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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Mar 19. 2022

38. ‘공간’이 주는 위로(나만의 다락방)

- 나를 충만케 하는 것들(2)

20여 년 전 가족과 함께 살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직장을 찾아 서울로 올라오면서 시작된 싱글 생활은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설렘을 안겨주었다. 부모님 집에서 남동생, 여동생 등 다섯 식구가 복닥거리며 살 때 독립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만큼 여럿이 더불어 사는 데 불만이 없었다. 남동생이 취직해 서울로 가면서 남동생 방이 비었지만 오래 한방을 쓰던 나와 여동생은 서로 ‘니가 가라, 하와이’ 놀이하듯 서로 남동생 방으로 옮겨가라고만 했을 뿐 아무도 남동생 방을 차지하지 않았다. 내가 서울로 올라오고 뒤이어 여동생이 결혼을 하면서 우리 자매의 오랜 한방 생활은 막을 내렸다.    

 

원룸에서 시작한 서울살이는 소꿉놀이 같았다. 내 안 어디에 그런 알뜰함이 있었는지 겨우 7평 원룸을 채우는 데 이루 셀 수 없는 저울질이 있었다. 좁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모두 있는 그곳은 내가 태어나 처음 누리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었다. IMF로 실직하지 않았다면 세상 물정 모르던 내가 고향을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뜻하지 않은 상황이 나를 엄마‧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독립하게 하는 단초가 됐으니 세상엔 100% 나쁜 일도, 100% 좋은 일도 없다는 말을 믿게 됐다.   

  

결혼하기 전까지 내가 거쳐온 그 공간들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 7평 원룸‧10평 원룸, 지은 지 30년 된 17평 아파트, 처음 장만한 17평대 아파트와 24평대 아파트 등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간 내 보금자리가 됐던 그 공간들을 떠올리면 마치 태아가 엄마 자궁 안 양수 위에 편안하게 떠 있던 시절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나 혼자만의 공간은 그때의 나에게 가장 잘 맞고, 가장 잘 어울리는 옷 같았다. 상황에 맞게 색깔과 디자인이 다른 옷을 갈아입듯 나는 공간이 바뀔 때마다 한 뼘씩 꿈을 키워갔다. 그래서 그 어떤 집도 내게는 그 시절 최선의 공간이었고, 최애의 장소였다. 지금 돌아보니 어쩌면 나는 그 공간들과 연애를 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런 공간에 대한 애착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여중 시절 다섯 식구가 좁은 아파트에 살다가 연못이 있는 단층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아파트보다 외풍이 많아 추웠지만, 작은 방에 이어진 부엌 위 다락방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래된 삼단 매트를 한쪽 벽에 붙여둬서 백열등 아래 누워 책을 보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그 공간에서 한국 단편 50권 전집을 읽었다.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기라도 한 날은 불도 켜지 않고 콕 틀어박혀 억울함과 슬픔을 풀어내는 곳이기도 했다. 여기저기 내 눈물 자국이 남아 있던 삼단 매트는 대학 졸업반 때 이사를 하면서 그 역할을 다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때 그 공간을 어제 일처럼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더없는 기쁨과 슬픔, 절망의 순간, 나를 품어줬던 그 공간들은 항상 그때의 감정과 한 묶음으로 머릿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저장됐다. 남향의 원룸에 살 땐 창으로 가득 쏟아져 들어오던 햇살 속에 뒹굴뒹굴하며 깊은 휴식을 즐겼다. 햇볕 구경을 할 수 없었던 북향의 원룸에선 더없이 안으로 깊어지는 사유의 시간을 누렸다. 그리고 전망이 확 트인 고층 아파트에선 하늘이 보여주는 구름 예술에 감탄하며 주말에도 집 밖으로 나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지막한 산을 액자처럼 품고 있던 저층 아파트에선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산을 보며 그림을 배우고 싶었고 결국 그림을 배우게 됐다.      


어느 해 마지막 날 집으로 초대한 후배들과 자정 넘어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며 잠들었다가 늦잠에서 깨 커튼을 열어젖혔을 때 온 세상을 하얗게 채색한 눈 덮인 풍경에 탄성을 질렀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때의 감격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를 있는 그대로 품어줬던 그 공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내가 거쳐온 그 공간들은 그 시절 나를 에워쌌던 갖가지 문제로부터 나를 온전히 지켜준 신의 품 같았다.     


긴 노동을 마치고 나만의 공간으로 돌아왔을 때 종일 쓰고 있던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공간. 그 누구와도 논쟁하거나 타협할 필요가 없는, 먹고 싶을 때 먹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공간. 그 ‘마음대로’의 공간은 그날 하루 집 밖에서 있었던 설왕설래와 불통의 답답함을 풀어내는 마법을 부리곤 했다. 그 공간들 덕에 평생 싱글로 살 것을(스스로뿐만 아니라 절친들도) 의심치 않았던 내가 뜻밖의(?) 결혼 생활도 해나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휴직을 하고 한 달여가 지나서야 공부방 정리를 시작했다. 회사 책상을 정리하면서 집으로 가져온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던 책상을 정리하자 책상 표면이 얼굴을 드러냈다. 이제야 오래 머물고 싶은 공부방, 오래 앉아 있고 싶은 책상 꼴이 갖춰졌다. 나만의 ‘다락방’이 생긴 것이다. 허리를 숙이지 않아도 되고, 어두운 백열등이 아닌 LED등으로 환한 나만의 공간. 그 공간에서 지금 여기의 고민을 쓰고 위로를 얻을 것이다. 고민의 시간이 지난 다음엔 충만의 시간이 찾아올 것을 믿는다. 지금까지의 다락방들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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