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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Mar 27. 2022

39. 입원 앞두고 뚜벅이 여행이라니

- 설렘 반 걱정 반 제주 여행을 앞두고

제주 여행을 하루 앞둔 날 오후 폐 CT 결과를 보러 대학병원 진료실로 들어갔다. 경쾌한 목소리의 담당 교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흡연은커녕 간접흡연도 경험할 일이 없는데 폐 결절이 있다니 믿기질 않았다. 몇 개월 전 정기 건강검진에서도 아무런 낌새가 없었는데 몇 개월 사이에 17mm 크기의 결절이라니. 의사는 단기간에 생겨 커진 데다 크기도 작지 않아 그냥 둘 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바로 전신마취를 하고 절제를 하기엔 위험 부담이 있으니 조직검사로 악성 여부를 파악한 후 다음 스텝을 밟자고 했다.

     

진료실을 나와 입원 날을 최대한 빠른 날로 잡았다. 조직검사와 관련한 설명을 듣는데 부작용(기흉) 확률이 20%라는 데서부터 내 귀는 먹통이 됐다. 긴 설명 이후 여러 장의 유의사항까지 받아 들고 집으로 오니 이미 저녁 무렵. 남편 퇴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편은 2개월 전부터 내 생일에 즈음한 나흘간의 제주 여행을 설계하면서 더없이 즐거워했다. 그때 이미 나는 여러 진료과를 돌며 검사하느라 여행에 설렐 여유가 없었다. 이번 제주 여행을 마치 인생 여행으로 길이 남기기라도 할 태세로 디테일한 일정을 세우려는 남편. 그런 남편에게 나는 여행의 예측 불가성과 현장성을 들먹이며 세세한 일정 짜기에서 빠졌다. 결국 남편은 이틀은 제주 북서쪽, 이틀은 남동쪽에서 머무는 큰 틀만 짜고 혼자서 숙소 고르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여행이 바로 내일이었다. 남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전에 다른 진료과 검사 결과를 보러 회사까지 빠져가며 동행해준 남편이었다. 그땐 다행히 6개월 후 경과를 관찰하자는 결과가 나왔기에 남편은 오늘도 별다른 게 없을 거라며 날 안심시키고 출근한 터였다.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려면 오늘 밤에 여행 가방을 제대로 꾸려놔야 했다. 급한 마음에 옷장을 열어보니 모두 칙칙한 겨울 외투뿐이었다.     


언제부턴가 옷을 사지 않게 됐다. 뭘 입어도 옷 태가 나지 않는 때가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조직검사 결과에 따라 다음번 여행이 언제 가능할지 알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번 여행을 제대로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옷이 급해졌다. 얼른 동네의 옷가게 몇 곳이 떠올라 뛰어나갔다. 색상은 화사하면서 3월 중순의 꽃샘추위와 제주 바람을 막아 줄 외투가 필요했다. 세 곳의 옷가게를 돌았는데 딱 떨어지는 옷이 없었다. 퇴근 중인 남편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옷가게 근처였다. 남편의 조언대로 옷을 골랐더니 생일선물이라며 결제까지 해줬다. 여행 계획 세우는 것도 남편한테 미뤘는데 울컥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대충 차린 저녁을 먹으며 남편은 병원에선 뭐라고 하더냐고 물었다. 나는 한껏 태평한 표정으로 6개월 후 경과 관찰이 그 병원 트레이드마크인가 보다며 죄 없는 병원을 물 먹였다. 남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행 전날 모드로 돌아갔다. 그렇게 제주 이야기를 하다가 이번 여행이 뚜벅이 여행이란 걸 알게 됐다. 여행 마치고 며칠 후 입원해 조직검사를 하려면 제주 여행에서 무리를 해선 안 되는 상황. 제주 여행이라면 당연히 차를 렌트해서 맛집에서 밥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 찾아 커피 마시며 사진만 찍으면 되는 줄로 알았다. 그만큼 나는 제주 여행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여행을 하루 앞두고 남편이 그동안 계획한 방식을 뒤엎고 싶진 않았다.      


남편은 차로 유명 관광지를 점찍듯 순례하는 여행이 아니라 한곳에 오래 머물고 걸으며 음미하는 여행을 계획했다. 그 계획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내가 문제였다. 입원할 상황만 아니라면 하루 1만5000보는 아무 일도 아닐 텐데,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그렇게 여행 날이 밝았고 국내선 항공기는 작은 크기만큼이나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가뿐한 이륙이 마치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기라는 응원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제 결절이니, 조직검사니 하는 걱정 보따리는 몽실몽실한 구름 사이로 던져버리자. 등받이에 깊이 등을 파묻자 온 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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