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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Apr 16. 2022

40. 제주를 누리다(1)

- 걸을 때 비로소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

3월의 어느 날 김포공항에서 8시 반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려 버스로 제주 올레길 15길과 16길 사이에 있는 애월읍의 숙소(보헤미안애월)에 도착하니 10시 40분. 입실 시간이 오후 4시라 주인에게 짐을 맡겨놓고 아점을 먹으러 근처 맛집(화연이네)으로 갔다. 정갈한 반찬들과 양이 꽤 푸짐한 갈치조림이 밥 먹는 속도가 한없이 느린 내 젓가락질 속도를 높였다. 곁들이로 나온 된장국이 어찌나 담백하고 맛있는지 무슨 된장국이냐 물었더니 직접 담근 된장에 늙은 호박 등 야채를 넣은 게 전부라고 했다. 우리 집 식탁에서 국을 퇴출-염분 섭취를 줄이기 위해-시킨 터라 가끔 여행지 식당에서나 맛을 볼 수 있는데 제주의 된장국은 슴슴한 데도 자꾸 숟가락이 갔다.     

 

흡족한 점심을 먹고 남편의 계획대로 16길을 먼저 걷기로 했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사람 없는 바다 풍경을 사진에 담고 모래 대신 검은 돌이 깔린 바다 가까이 내려갔다. 투명한 바닷물이 검은 돌을 씻듯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동영상으로 찍으며 서울에서의 답답했던 일상을 잊었다. 강에서와는 또 다른 물멍 놀이를 하다 3km쯤 지점에서 발길을 돌려 숙소 쪽을 향해 다시 걸었다. 돌아오는 길엔 해변 쪽이 아닌 도로 안쪽 깊숙이 들어가 집과 밭이 있는 곳을 걸었다. 서울 우리 집 주변은 온통 소형 오피스텔 건축이 한창인데 제주는 여기저기 펜션 건축이 한창이었다. 이미 영업 중인 펜션도 많아 마치 펜션 박람회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6길 중간쯤에서 되걸어 15길 쪽으로 조금 걸어가니 ‘인디고인디드’란 카페가 눈에 띄었다. 커피와 레몬티에 당근케이크를 곁들여 바다 쪽 통창 앞에 앉았다. 제주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카페에서 당근케이크 한 조각 먹고 차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내 마음이 바다같이 넓어진 듯했다. ‘서울에서의 나’와 ‘제주에서의 나’는 다른 사람 같았다. 공간이 부리는 마술인가! 입원이니, 조직검사니 하는 단어들은 제주 바다 앞에선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제주 바다를 원 없이 쳐다보느라 서울서 가져간 책은 펼쳐 볼 겨를이 없었다.     


새벽같이 서둘러 아침 비행기를 탄 덕에 5km를 걷고 점심 먹고 차까지 마셨는데도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히 숙소 주인이 청소가 끝났다며 일찍 입실해도 된다는 문자가 왔다. 살짝 고단하던 차에 서둘러 숙소로 들어갔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방과 창 가득 들어오는 제주 바다를 보며 남편이 그 많고 많은 숙소 중 내 맘에 들 만한 곳을 찾느라 얼마나 검색을 했을지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도 난 남편에게 감사를 표하는 데 인색하다. 타인에겐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말이다. 내가 창밖 풍경에 감탄하자 남편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틀간 묵을 숙소라 가방을 풀어 옷을 꺼내 걸고 휴대전화를 충전기에 꽂고 대충 정리를 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창 앞에 나란히 놓인 흔들의자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과 나는 대낮인데도 깊은 잠에 빠졌다. 여기가 어디지? 하며 눈을 떴을 때 잔잔한 바다가 나를 향해 무음으로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갔다. 아, 이런 평화도 있구나.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배꼽시계가 요동을 쳤다. 11시에 아점을 먹었으니 5시면 허기가 질 만도 했다. 새벽 5시부터 시작된 하루는 마술을 부리기라도 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코로나 후유증인지 고깃집이나 파스타집 외엔 문 닫은 식당이 많아 걸어서 갈 만한 범위 내엔 내가 선호하는 한식집이 없었다. 다시 폭풍 검색을 한 뒤 이번엔 고등어조림 맛집(바닷속고등어쌈밥)으로 가기로 했다. 같은 애월읍이지만 걸어서 가기엔 너무 멀어 택시를 탔다. 이른 시간인데도 식당은 거의 만석이었다. 푸짐한 양에 놀란 게 무색하게 순식간에 바닥이 드러나게 먹고는 소식가(小食家)인 우리 부부는 계면쩍게 마주 웃었다. 맛있는 음식이 심란한 마음을 다독여주는 경험이 얼마 만인지, 배도 마음도 꽉 채운 저녁이었다. 그렇게 제주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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