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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May 01. 2022

41. 제주를 누리다(2)

-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풍경

전날 많이 걸은 덕분에 우리 부부는 깊은 잠에 빠졌다가 오전 8시쯤 깼다. 남편이 커튼을 걷는 순간 마치 바다가 내가 누워 있는 침대를 향해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설면서도 편안한 이 기분은 뭐지? 부산에서 태어나 35년을 사는 동안엔 바다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바다 구경이 쉽지 않은 서울에 와서야 해운대 바다와 광안리 바다가 그리웠다. 그 덕에 코로나에 발이 묶이기 전까진 거의 매년 해운대로 휴가를 갔다. 어느 계절에 가도 해운대는 새로웠다. 제주의 바다도 해운대 못지않았다. 어제 오후에 본 바다와 침대에 누워 보는 바다가 달랐다. 파도의 모양이, 바닷물의 색깔이 어제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가로로 대여섯 가지나 되는 각기 다른 푸른 빛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 나갔다. 그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바다색은 터키블루였다. 전날의 잔잔하던 모습과는 달라진 파도는 오늘 날씨가 달라지리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한동안 다채로운 푸른색으로 변화무쌍한 그림을 통창 가득 채워주는 바다를 보며 뒹굴뒹굴하던 나는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일어났다. 절제된 순백의 느낌 가득한 이 숙소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자레인지가 없다는 거였다. 숙소의 향기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터. 하지만 냉‧온‧얼음정수기에 발효차와 커피까지 준비돼 있으니 그조차도 양해가 됐다. 컵라면으로 허기를 면하고 나니 그제야 드립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드립커피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던 터라 둘이 머리를 맞대고 설명서를 들여다봤다. 새로운 놀이를 하듯 뜨거운 물을 드립백에 조금씩 부었다. 커피가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걸 보는데 ‘아, 커피 내려 마시는 게 새로운 리추얼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10시에 숙소를 나온 우리는 어제와는 반대 방향인 15길을 걸었다. 1시간여를 걸어서 전복뚝배기 전문점인 우영담에 도착했다. 전복뚝배기와 전복돌솥밥을 시켰다. 소문난 집답게 주메뉴는 훌륭했다. 그런데 내 입맛을 더 돋웠던 건 주메뉴가 나오기 전 미리 차려진 반찬이었다. 식당 주인이 직접 재배한 오이고추무침은 밭에서 갓 따서 쌈장에 버무린 듯 투명한 빛이 도는 연초록으로 내 젓가락을 가장 먼저 끌어당겼다. 눈을 홀린 데 이어 입안에서 아삭거리는 소리와 혀로 느껴지는 맛이 입맛을 확 돋워주었다. 마늘종무침도 맛있었고 처음 본 게우젓 등 주연, 조연할 것 없이 모두 맛있었다. 제주 음식으로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다시 커피가 당겼다.      


15길을 다시 걸어 인생 커피숍이라 할 만한 커피숍을 만났다. 이름조차도 의미심장했다. 마치 입원을 앞둔 내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말해주듯 카페 ‘지금 이 순간’에서 바다 풍경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카페 안을 구경하다 보니 ‘지금 이 순간’은 카페 사장님 소유의 은퇴한 경주마 이름이었다. 화려한 전적을 자랑하는 말 ‘지금 이 순간’이 말띠인 나를,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해온 나를 응원하는 듯 여겨졌다. 데뷔가 있으면 은퇴가 있듯, 비록 정년은 못 채웠지만 휴직을 누린 다음 기꺼운 마음으로 퇴직하는 것도 좋은 마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일흔까지 일을 하겠다는 로망이 있었던 터라 내 건강과 부모님 건강 등 여러 상황이 받쳐주지 않는 데도 미련을 떨었다. 미련이 차고 넘쳤는지 몸 여기저기서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결국 암이 의심된다며 조직검사까지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찾은 ‘지금 이 순간’이란 카페에서 알게 된 은퇴한 경주마의 사연이, 카페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이 퇴직을 앞둔 나를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듯하다. 대학 졸업 후 30년 넘게 앞만 보고 달렸으니 이제 좀 쉬어도 되지, 나를 토닥이기에 이보다 완벽한 장소는 없을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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