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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May 14. 2022

42. 제주를 누리다(3)

- 여행과 일상의 균형

제주 여행 사흘째, 이틀간 머물렀던 올레 15길(제주 북서 지역)의 숙소를 나와 올레 4‧5길(제주 남동 지역) 사이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뚜벅이 여행에 걸맞게 애월 숙소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제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탔다. 제주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하향 관통하느라 1시간 넘게 걸려 터미널에 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연잎밥을 먹으러 근처의 다담으로 갔다. 2층짜리 가정집을 식당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연잎밥에 떡갈비와 전복이 나오는데 가격이 정말 착했다. 연잎밥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는데 정갈한 밑반찬들이 눈을 먼저 즐겁게 했다. 천천히 입으로 즐기고 만복감이 느껴질 무렵 다시 올 것을 예감하며 남원읍으로 향했다.   

   

셋째 날 숙소는 남원읍 태흥리 포구에서 가까운 '다빈하우스'였다. 버스에서 내려 거의 1시간을 걸어 찾아간 그곳은 제주의 평범한 동네 안에 숨어 있듯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활짝 열린 대문 앞엔 덩치가 소만 한 하얀 순둥이가 긴 줄에 묶여 마치 내 어깨를 끌어안을 기세로 반긴다. 그런데도 태생이 동물과 친하지 않은 터라 남편 등 뒤에 숨어서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늑하고 단정한 정원, 마당 한쪽의 자쿠지와 집 옆의 귤밭이 친척 집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다빈하우스를 누리려면 귤도 따고, 자쿠지도 즐기고, 항아리바비큐도 해야 하는데 올레길을 걷는 데 방점을 찍은 터라 짐을 풀고 바로 올레 4길을 걸으러 나왔다.      


그러나 올레 4길은 잘 관리되지 않은 데다 인적도 없어 혼자가 아닌 데도 무섬증이 일었다. 그래도 남편이 목표로 잡은 멋진 커피숍을 찾아 1시간을 걸어갔는데 … 또 수리 중이었다. 올레길을 벗어나 시내 쪽에서 커피숍을 찾아보기로 했다.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한적한 이면 도로를 헤매다 조그만 카페 ‘여행가게’를 만났다. 얼마나 반갑던지 소박한 그 카페가 그날의 최고 힐링 장소가 됐다. 카페 주인이 여행을 다니면서 사 온 각양각색의 차와 그릇들이 전시돼 있었고 여행 관련 중고 책을 팔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다리 쉼을 하면서 ‘여행 말고 한 달 살기’를 읽게 됐다. 여러 나라 40곳에서 한 달 살기를 경험한 부부가 쓴 책이었다. 작가는 낯선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천천히 살피고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퇴직 후 한 달 또는 1년 살기를 해보고 싶었던 차에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반가운 책이었다.      


충전된 몸과 마음으로 저녁 먹을 곳을 찾아 나선 지 한참 만에야 찾은 곳은 횟집. 그런데 밥값이 너무 비쌌다. 2인에 8만 원이라니 ㅠㅠ 그러나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반경 1km 내엔 식당이 없었다. 좀 더 먼 곳에 파스타집이 있긴 했지만 종일 많이 걸은 터라 다시 그곳까지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선택지가 없는 그 횟집의 전채요리는 달거나 짜거나 매웠다. 회를 좋아하지 않는 내 입엔 마지막에 나온 알밥 비빔밥 말고는 먹을만한 게 없었다. 그렇게 바가지 쓴 듯한 기분을 순식간에 날려준 건 식사를 마치고 나와 마주친 저물녘의 하늘과 바다가 그려낸 풍경이었다.      


거의 텅 빈 듯한 바닷가에서 놀이하듯 사진을 찍다가 캠핑카 앞에 의자를 놓고 바다 풍경을 감상 중인 커플을 발견했다. 바다를 전세 낸 듯한 여유로움, 제주와 코로나가 만들어 낸 장면이었다. 1년 365일 관광객이 끊이질 않던 제주관광특구의 바닷가 풍경이 이렇게 호젓할 수 있다니. 우리 부부는 타인의 눈을 의식할 필요 없던 그 바닷가에서 마치 아이로 돌아간 듯 사진 찍기 놀이를 하다 어두워져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만 예약한 숙소로 돌아오니 사장님은 다빈하우스만의 특색을 경험하지 못하고 다음 날 떠나야 하는 걸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종일 걷고 또 걸었던 그날 저녁,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구경도 얼마 못하고 일찍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3박 4일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 부부는 올레 5길을 걷기로 했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5길 시작점에 있는 '엄마밥상'에서 고등어구이와 성게미역국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다시 멋진 카페를 찾아 길을 나섰다. 남쪽이어서인지, 아니면 이상기온인지 3월 중순인데도 5월 한낮 같은 따가운 햇빛 아래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참을 걸어 찾은 그곳도 역시나 수리 중이었다. 금세 방전되는 저질 체력으로 뚜벅이 여행을 하자니 매일 두어 번씩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자칫 길거리에서 부부 싸움을 할 뻔한 위기는 마지막 날까지 우리를 따라다녔다. 결국 오던 길에 지나친 아주 작은 카페에 가기 위해 길을 되짚어 걸었다. ‘라향’, 이름도 향기롭고 앙증맞은 그 카페엔 손님이 없었다. 땡볕에 오래 걸어 휴식이 절실할 때 만난 카페엔 우리 말고는 손님이 없었다. 뜻하지 않게 카페를 전세 낸 기분이었다. 안락의자처럼 몸을 폭 감싸 안아 주는 데다 뒤로 비스듬히 젖혀지는 의자에 반쯤 누워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보니 몸도,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1시간여 체력을 회복한 후에 가뿐한 기분으로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짐을 맡기고 날아갈 듯 가벼운 몸으로 동문시장으로 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큰 시장 구경이 얼마 만인지. 청년 사장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파는 미니 리어카 가게가 통로 가운데 줄지어 서 있고, 달인 같은 손기술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구경하거나 사진 찍는 사람들로 시장은 생기가 돌았다. 살아서 펄떡일 것 같은 은갈치의 크기에 놀라고 가격에 또 한 번 놀라며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 동문시장에서 난생처음 갈칫국을 맛보았다. 머리로는 어떤 맛일지 상상이 안 되던 갈칫국은 생각보다 담백하고 맛있었다. 그 맛난 저녁을 끝으로 시장 구경을 마친 우리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왔다.      


저녁 8시 반 비행기에 자리를 잡고 나니 지난 3박 4일간의 여행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고단한 와중에도 내 머릿속엔 벌써 서울 도착 후 해야 할 일이 시간별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조직검사를 위해 곧 입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첫 번째일 테다. 하지만 오늘 밤은 익숙한 침대에서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다. 하루 미룬다고 큰일이 벌어지진 않을 테니 말이다. 공항에서 공항철도를 타고 지하철로 환승해 돌아온 집은 마치 한 달쯤 떠났다 돌아온 것처럼 반갑고 편안했다. 제주 바다의 여운이 남아 있었지만 역시 쉴 곳은 내 일상이 녹아있는 ‘우리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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