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생이던 1970년대 부산에 살던 시절, 지금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찾을 수 없는 그릇장이 있었다. 당시엔 '차 단스(簞笥)'라고도 불렀다. 내 기억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그릇장이 의식의 표면 위로 떠오른 건 최근 수강한 한 워크숍 과제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그림에 대한 감상이 과제였는데 문제는 촉박한 시간이었다. 쫓기듯 대형 서점의 미술 코너를 오가며 여러 화가의 그림을 훑어보던 날이었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던 중 그 그릇장이 불쑥 떠올랐다. 그릇장의 오른쪽 여닫이문 안쪽에 콧날이 아름다운 긴 머리 소녀의 그림(르누아르, <이렌 캉 당베르 양의 초상>, 1888년)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림이 그릇장과 한 묶음으로 기억에 저장된 걸 보면 그릇장은 내가 초등생도 되기 전에 이미 우리 집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릇장은 진하고 연한 회색 세로줄 무늬가 반복되고 에나멜처럼 광택이 나는 가구였다. 상부장 왼쪽엔 그릇들이, 하부장엔 잡다한 부엌살림이 들어 있었다. 상부장 오른쪽, 그러니까 안쪽에 소녀 그림이 붙어 있던 여닫이문을 열면 외할머니가 시집간 딸(엄마)에게 보낸 손편지들과 함께 손님이 오면 꺼내 쓰는 새 수저 등이 들어 있었다.
그 여닫이문을 열 때마다 보게 되는 소녀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어린 마음에 묘한 꿈틀거림을 불러일으켰다. 머나먼 이국의 소녀인데도 정적인 분위기가 전해졌고, 사춘기에 접어든 여중 시절엔 소녀끼리의 끌림 비슷한 걸 느끼기도 했다. 게다가 그 말간 눈동자와 뽀얀 살결은 내가 꼭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릇장이 있던 작은 아파트에서 복작대며 살던 우리 가족은 내가 여중생 때 작은 연못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그 직후부터 우리 집에 오래 세 들어 살던 강미 엄마는 뭐든 우리 엄마가 하는 거라면 유심히 보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을 쏟아내곤 했다. 가령 우리 엄마가 세계명작전집을 사면 어느 출판사 책을 사는지, 내게 옷을 맞춰 입히면 어디서 얼마를 주고 맞췄는지 물어보는 식이었다.
어느 날 작은 방에서 내가 그릇장 문을 여는 틈에 그 소녀 그림을 본 강미 엄마는 "아줌마(우리 엄마)가 임신하고 붙여놓은 그림인가 봐요"라고 한 적이 있었다. 엄마가 그 말에 빙긋이 웃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강미 엄마는 "어디서 이런 참한 그림을 구했어요? 나도 이런 그림 붙여놓고 태교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했다.
그 당시 대여섯 살쯤이던 강미는 빈말로라도 예쁘다거나 귀엽다고 할 수 없는, 부모 어느 쪽도 닮지 않은 천방지축인 여자아이였다. 강미 엄마는 내가 얌전한 소녀로 자란 비결이 마치 그 그림에 있기라도 한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 그림이 르누아르 그림이란 건 알았지만, 그림 속 주인공이 르누아르 후원자였던 은행가의 딸 '이렌 캉 당베르'라는 건 과제를 하면서 알게 됐다. 갑자기 그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게 어떻게 그릇장 문 안쪽에 붙게 됐는지, 엄마가 어디서 구해 온 건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아두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엄마는 2년 전 2월 뇌출혈로 쓰러져 요양병원에서 재활치료 중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와 이제는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됐으니 모든 건 내 무의식에 가라앉은 기억의 조각들을 되살려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지금도 선명한 기억은, 그 그림이 화보(畫譜)나 달력 같은 데서 오려낸 듯 꽤 두꺼운 종이였고 문 안쪽이라 손을 탈 일이 없어 그 집에 사는 8년 동안 훼손 없이 잘 보존됐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대학 졸업 무렵 다시 이사하면서 그릇장은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새집은 2.5층짜리로, 1층은 세를 주고 2층과 2.5층을 우리 가족이 쓰기로 했다. 부모님과 남동생이 2층을 쓰고, 2.5층은 여동생과 나 둘만 쓰기로 해 우리 자매는 잔뜩 신바람이 나 있었다.
게다가 새 옷장과 처음 가져보는 화장대까지 들이면서 소녀 그림은 물론 나와 60년 차이 나는 말띠 할머니가 엄마에게 보낸 편지들은 내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그 편지가 얼마나 귀중한 유산인지를 깨달았다. 뒤늦게 샅샅이 뒤졌지만, 할머니 편지는 단 한 통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할머니가 그리웠다. 할머니는 마치 붓글씨를 쓰듯 죽 이어서 세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항상 '김실(엄마), 안실(이모) 보아라'로 시작했다. 이모부가 경찰이어서 전근할 때마다 자주 이사 다녔기에 할머니는 항상 우리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한글이긴 했지만, 글자를 이어 쓰다 보니 때로는 무슨 글자인지 헷갈려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편지가 배달된 날이면 엄마, 아버지, 나 셋이 머리를 모아야 했다. 어떨 땐 몇 문장 못 읽고 헤맬 때도 있었다. 시집간 딸을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며 문장을 읽고 또 읽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해석한 순간이면 마치 암호 해독이라도 해낸 듯 환호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서울 외삼촌 댁에서 돌아가신 1993년 초여름, 옮겨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에 휴가를 낼 수 없었던 나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 제대로 애도하지 못해서인지 훗날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옮겨와 사는 동안 할머니가 눈물 나게 그리운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 편지를 챙겨놓지 못한 엄마에게 너무 무심한 딸이라며 원망을 쏟아냈다. 그러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앉곤 했다. 엄마가 병원에 누워 있는 지금은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조차 숨이 막히는 듯하다.
무심한 것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엄마가 할머니 편지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것처럼 나 또한 어린 시절 무의식 속에서 내 삶의 지향이 됐을 게 분명한 소녀 그림을 지키지 못했다. 딸이 그림 속 소녀처럼 곱고 단아하게 자라길 밤낮으로 빌었을 엄마. '소녀' 그림을 떠올리면 그 장 안에 쌓여 있던 할머니의 편지가 함께 떠오른다.
중년에 혼자된 할머니는 먼 곳으로 시집간 딸들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를 편지에 가득 담아 보내곤 했다. 그 할머니의 딸(엄마)이 자식을 잊은 채 병원에 누워 있다. 자식은 철들지 않는 존재들인가 보다. 부모가 떠난 뒤에야, 부모가 몸져누운 뒤에야 애달파한다.
뜻하지 않은 기회에 르누아르의 소녀 그림을 떠올린 후 그 '소녀'를 한동안 마음에 담고 지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각기 다른 농담으로 보이는 다양한 소녀 그림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클릭 몇 번이면 볼 수 있는 수많은 르누아르의 소녀 그림은 그 옛날 젊은 엄마가 어디선가 오려내 붙여놓았던 게 분명한 그 그림을 넘어서지 못한다.
명화(名畫)를 접하기 쉽지 않던 시절, 오랫동안 엄마의 기도를, 그 간절한 마음을 경청하고 지켜보던 그 '소녀' 덕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