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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Feb 11. 2023

59. 공감각적인 글쓰기

―나의 이름

※지난해 아주 새롭고 흥미로운 수업을 들었다. 과제 또한 특별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 『워터 슈가멜론에서』 속 화자가 끝까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수강생들도 같은 형식으로 ‘나의 이름’을 쓰는 과제였다. 대부분의 수강생이 과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 우왕좌왕했던 기억이 주말 아침 미소를 짓게 한다.


―나의 이름


드디어 나의 이름을 내 마음대로, 그대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왔다.

‘지금 여기’를 누리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시시콜콜 말하진 않겠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폭우가 내리는 날, 범람할 듯 말 듯한 강변을 산책하는 누군가를 봤다면 

그대는 ‘여보세요’ 또는 ‘저기요’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핸들 없는 자전거, 게다가 바퀴가 하나뿐인 자전거를 타고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3차선을 달려가는 근육질의 남자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눈동자.

그것이 내 이름이다.


배가 출출해진 오전과 오후의 경계, 

미니 단호박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6분간 돌린 후 들리는 경쾌한 소리 ‘땡’. 

그것이 내 이름이다.


나무에서 뻗은 가지, 그 가지에서 뻗어 나온 또 다른 가지의 기상, 

그 끝에 맺힌 무수한 봉오리들. 때로는 은은한 분홍빛을 띠다가 때로는 격정적인 색깔로 변신하는 것.

그것이 내 이름이다.


바나나 한 개, 삶은 달걀 한 알, 냉동 블루베리 두 숟갈, 호두 두 숟갈, 아로니아 분말 반 찻숟갈, 우유 100ml.

이 모두를 믹서에 갈아 뒤집힌 원뿔형 모양의 유리잔에 담았을 때 느끼는 은은한 보랏빛 주스의 환상.

그것이 내 이름이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방식의 과제에 당황한 당신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가까스로 떠올린 기억 한 조각. 

그 옛날 당신 아버지의 책장에 꽂혀 있던 누렇게 변한 문고판에서 읽었던 짧은 글.

그것이 내 이름이다.


당신이 바다 한가운데서 맘껏 파도를 즐긴 후 해변으로 헤엄쳐 나와 처음 밟은 모래를 떠올리길 바란다. 

햇살에 반짝이는 모래 알갱이가 당신의 젖은 발에 달라붙을 때의 감각.

그것이 내 이름이다.


여전히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강물은 계속 흐른다. 

때로는 그 강물이 당신을 그 여름의 바닷가로 데려다 놓기도 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당신의 목소리는 여전히 젊고, 당신의 눈동자 속에는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그중 가장 행복했던 한때를 추억하는 그 찰나의 얼굴.

그것이 내 이름이다.


당신이 길을 잃고 헤매던 어느 밤, 

남쪽 하늘에서 빛나는 전갈자리를 찾아본 적이 있다면 더는 그 어떤 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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