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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Dec 05. 2022

55. 타인을 위해 운다는 착각

―때로는 당신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줄 수 있기를

몇 년 전, 회사에서 친화력 하면 따를 자가 없는 선배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서와 상관없이 두루두루 후배들 챙기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가벼운 농으로 그 잠깐 사이에도 웃게 만들던 선배였다. 젊은 날에는 회사 행사 때마다 타고난 유머 감각으로 사회를 보며 동료들을 들었다 놨다 하던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런 어느 날, 선배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직속상관에게 찍혀 생뚱맞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후배들이 더 아우성을 치는 인사였다. 그런데도 선배는 옮겨간 부서에 맞는 사람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그전까지 외부 요청에 따라 사람들 만나느라 바빴던 선배는 이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머리 숙여야 하는 사람답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댄디한 스타일로 변신했다. 헤어스타일에서 슈트, 구두에 이르기까지 스타일리스트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회사 주변에서 마주쳐도 너무 달라진 스타일 때문에 선배가 먼저 알은척하지 않으면 몰라볼 정도였다. 꽤 오랫동안 선배를 제때 알아보지 못해 선배가 먼저 인사하는 민망한 상황을 수없이 겪었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선배를 먼발치에서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그즈음, 선배의 암 발병 소식을 들었다. 어이없는 인사 발령에도 품격을 잃지 않았던 선배, 그 속이 오죽했을까. 마침 나 또한 몸 여기저기서 통증이 시작되던 때였다. 지나고 나서야 그게 갱년기 증상이란 걸 알았지만, 그땐 원인을 몰라 대학병원 명의에게 예약하고 몇 개월째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마침 알레르기비염까지 갑자기 심해져 회사 근처 이비인후과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데 절친이 전화를 해왔다. 별일 없냐는 절친의 안부 인사에 그만 눈물샘이 터지고 말았다. 울음 섞인 내 목소리에 놀란 절친에게 선배 얘기를 하며 오열했다. 그날 병원 비상계단에서의 길었던 통화 장면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는 한 번도 선배에게 진심 어린 전화를 하지도, 만나서 식사나 차를 대접한 적도 없다. 처음엔 선배를 만나면 내가 먼저 울어버릴 것 같아서, 시간이 좀 지나서는 어떤 말로 선배를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마저도 제대로 된 이유가 아니라는 건 한참이나 지난 뒤에 알게 됐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선배는 수술을 받고 회사로 돌아왔다. 복귀한 선배는 아끼던 후배 몇몇을 중식당으로 소집했다. 수술 잘 받고 왔다는 신고식 같은 모임이었다. 조금 수척해지긴 했지만 선배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원래도 입담이 좋았던 선배는 수술 후 생긴 일상의 변화를 소재로 한 새로운 유머를 선보이며 후배들을 웃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 웃음 포인트에서조차 웃는 게 힘이 들었다. 암 수술을 받은 선배는 유머를 구사하는데 초대된 나는 울상을 짓지 않으려 용을 쓰는 아이러니.      


몇 년 전 선배와 함께한 중식당에서의 식사 장면이 이토록 선명히 기억에 남은 이유는 내 이기심에 대한 자각에 있었다. 선배의 발병 소식에 오열했던 것, 선배와의 식사 자리에서 표정 관리하느라 애썼던 것은 과연 선배를 걱정해서였을까. 지나고 보니 모든 게 명확했다. 선배의 발병 소식은 당시 원인을 알지 못한 내 몸의 통증이 혹시 암은 아닐까 하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스위치가 됐다. 내가 암에 걸릴까 봐 무서운 게 먼저였고, 그다음은 나를 믿고 지지해주던 선배가 회사를 떠날까 봐 두려웠던 거였다. 그때의 오열은 온전히 선배를 걱정해서 터져 나온 게 아니었다. 선배에 대한 안타까움은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뒤늦게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나 자신이 너무 지질해서 선배와 마주칠 때마다 부끄러웠다. 한참 뒤 그런 속내를 절친에게 털어놨을 때 들었던 말. “그게 사람이야. 우리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야. 그냥 보통 사람이잖아.”     


절친의 그 한마디에 머리를 쥐어박힌 것 같았다. 내 깜냥이 어느 만큼인 줄도 모르고 마치 선배에 대한 애정으로, 안타까움으로 오열한 줄 알았다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엔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 부끄러워했다가 정말 혼자서 이쪽저쪽을 오갔다. 절친의 한마디에 내가 타인의 불행에 온전히 그를 위한 마음으로 울어줄 만큼 인간애가 깊지도, 그렇다고 부끄러움을 모르지도 않는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타인의 아픔을, 슬픔을 접할 때마다 감정을 다잡는다.      


그러고 얼마 후 홀어머니를 여읜 싱글인 여자 선배를 조문하러 갔을 때였다. 친정엄마 생각에 가슴 한가운데 뭐가 걸린 것처럼 아프면서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고인에게 예를 표한 후 식사 자리에서 내 옆에 앉은 선배의 얼굴은 너무 담담했다. 아니,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반가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내 앞으로 반찬을 밀어주었다. 주중엔 하루 12시간 일하고, 간병인이 쉬는 주말엔 (정신은 맑지만) 편마비가 있는 모친을 몇 년간 혼자 감당해온 선배였다. 체격이 컸던 모친은 기저귀를 거부했고, 간병인 여러 명이 화장실 수발에 몇 개월을 못 버티고 그만두곤 했다. 앞선 부친상 때 재산 정리를 미리 하면서 언니, 오빠는 일찌감치 모친 간병에서 발을 빼는 바람에 선배 혼자 간병인을 계속 구해가며 직장엘 다녀야 했다. 그 세월이 몇 년이었다. 그런 선배 앞에서 내가 눈물 바람을 하는 건 실례일 수밖에 없었다. 내 눈물은 엄마를 잃게 될 내 걱정에, 혼자 남은 선배에 대한 안타까움이 조금 보태진 것일 뿐 선배를 위한 것도, 선배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지천명을 넘기고도 처음 마주치는 세상일 앞에선 눈물부터 앞선다.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알고, 타인을 제대로 읽어내고 품어주는 일은 갈수록 더 어렵기만 하다. 나 탐구와 타인 탐구는 살아 있는 한 계속될 숙제다.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맞고 말았다. 나를 알고,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나이 먹는 만큼만 깊어진다면 이 겨울날이 좀 덜 추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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