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
―상식과 윤리의 길은 다른 걸까?
며칠 전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후배를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함께했다. 내가 퇴직을 염두에 두고 있던 지난 연말에 본 후 처음이었다. 말수가 많지 않고 속정이 깊은 그는 따르는 후배도 많았고 선배들도 아끼는 사람이었다. 20여 년 전 상경해 외벌이로 자녀 둘을 대학에 보내는 동안 후배의 서울살이는 쉽지 않았지만,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후배의 얼굴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고단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50대가 되니 앞날에 대한 기대나 희망보다는 머지않아 맞게 될 노후에 관한 생각이 많아져 심경이 복잡해진다. 게다가 부모님 노환이 시작되고 병원비, 간병비 지출이 커지니 현재의 문제는 자신의 노후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진다. 후배가 우리 부모님 안부를 물으면서 대화는 회사 일에서 가정사로 넘어갔다. 후배 어머니의 고향은 내 친정엄마와 같은 경남 밀양이다. 게다가 두 분 모두 41년생 뱀띠다. 후배 어머니는 지금도 고향에 홀로 살고 계신다. 2년 가까이 병원에서 치료 중인 내 엄마와 시간제 요양사의 도움으로 생활하시는 후배의 어머니. 후배는 내 상황이 남 일 같지 않다. 게다가 후배와 어머니는 서울-경남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장남으로서 걱정이 클 수밖에 없다. 우리 삼 남매는 이런 상황이 두려워 일찌감치 부모님을 설득해 16년 전에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하시게 했다. 그나마 부모님 돌봄이 수월한 이유다.
이야기 주제는 어느새 우리 자신의 노후로 이어졌다. 이야기 도중 후배가 신문의 칼럼(‘마누라보다 아끼는 논’)을 톡으로 공유하며 인용된 소설(『브라보, 럭키 라이프』 정지아 작가) 속 아픈 자식을 둔 아버지의 선택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그 자리에서 칼럼을 단숨에 읽었다.
[소설 속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막내아들을 포기할 수 없어 가망이 없다며 인공호흡기를 떼자는 의사의 말에도 8년을 버텼다. 그 아들이 어느 날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지도, 말을 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냥 먹고 자기만 했다. 5년이 더 흐르는 사이 가진 것은 다 없어지고 논 하나만 남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보며 ‘이놈을 죽이고 나도 따라갈까, 그게 저에게도 나에게도 행복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술김에 아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아들의 목울대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아부…….” 13년 만에 처음 듣는 아들의 목소리,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비록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 못해도 아들은 생각할 줄 아는 어엿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 날 마누라보다 아끼는 논을 미련 없이 팔았고 나중에는 생활보호대상자가 돼 살았다. 그는 여전히 누워 있는 아들을 10년을 더 간병하며 살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자식들에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빚에 쪼들린 큰아들에게서 이제는 산 자식 죽는 꼴 보게 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부분 요약
칼럼을 쓴 왕은철 교수는, 온전하지 않고 온전해질 가능성이 없다고 버려도 되는 잉여적인 존재란 없다는 것을 소설이 환기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게 윤리, 상식과는 가는 길이 다른 윤리라고 말한다. 후배가 보낸 칼럼을 읽고 나니 불현듯 지난 9월에 읽은 인터뷰 기사가 떠올라 후배와 공유했다. 말기 환자를 지켜온 의사(박종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를 인터뷰한 ‘내가 본 가장 친절했던 죽음은…’이란 제목의 기사였다. 호스피스 완화의료기관에서 말기 환자들의 마지막을 지켜온 그에 따르면 사망진단서에 기록되는 죽음의 종류는 병사‧외인사‧불상밖에 없다고 한다.
[병원 입장에서 병은 치료해야 하는 것이기에 임종 직전까지 환자들은 수많은 검사를 하게 된다. 죽음을 사회와 격리시키니 자연사는 도태되고 있다. 의학적으론 의식과 기력이 떨어져 음식을 섭취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면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탈수가 발생하고 피가 산성화되면 고통 대신 행복감을 느낀다. 스스로 음식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물과 영양을 공급하는 건 자연스럽게 평온해지는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어서 논의가 시급하다. 현행법상 사전에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밝혔더라도 물과 영양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부분 요약
이 인터뷰를 통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다. 또한 자연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 실감 났다. 박종철 교수가 말하는 좋은 죽음은 두려움이나 공포에 몸부림치지 않으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일상을 사는 것이다.
이 칼럼을 접한 후 남편과 내 삶의 마지막에 대해 대화한 적이 있다. 난 긴박한 순간에 맞닥뜨리더라도 인공호흡기는 절대 꽂지 말아 달라고 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한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을 병원 침대에 누워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서처럼 의사가 인공호흡기를 떼자고 하는 데도 환자의 의지가 아닌 남은 가족의 고집으로 삶도, 죽음도 아닌 경계에 누워 10년, 20년을 보내는 일이 과연 ‘상식과 다른 윤리’의 길일까. 일전에 가족들에게 내 마지막이 새털처럼 가벼울 수 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아무도 반대하는 가족은 없었다. 자기의 마지막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 가망 없는 삶의 연장인 것도 모자라 남은 가족들의 삶을 위협하고 고통을 가중하기까지 한다면 어느 누가 인공호흡기로 연명하고 싶을까.
세상에 오는 일처럼 세상을 떠나는 일 또한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래도 50대가 되고 보니 죽음과 삶이 양극단에 있는 게 아니라 삶 속에 죽음이 깃들어 있는 하나의 공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부모님을 돌보고, 글을 쓰고, 계절에 감탄하며 숲길을 걷는 그 모든 순간에 나의 죽음도 공존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죽음이 없다면 삶의 그 어떤 순간이 빛을 발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귀하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