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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May 20. 2023

63.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이 어우러질 때

―삶이 반짝이는 시간

4월의 비 내리던 어느 날, 오은 시인의 강연 장소로 갔다. 날이 궂어서인지 그리 붐비진 않았다. 어떤 강의든 맨 앞에 앉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날도 그랬다. 강연자와 나 사이에 아무도 없을 때 훨씬 강의에 몰입하기가 쉽다. 한 줄 뒤에만 앉아도 앞사람의 뒤통수와 사소한 움직임이 시야에 들어와 강의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다.

    

유튜브에서 두어 번 접한 게 전부였던 오은 시인은 실제 모습이 훨씬 더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강건한 목소리도 한몫했다. 이래서 비대면보다는 대면이 좋다. 같은 시공간에서 간간이 눈을 맞추고 같은 순간에 웃음을 터뜨리거나 함께 안타까워할 때의 현장감, 그 생생함을 오랜만에 즐겼다.

    

그와 함께 시를 읽는 시간은 참 행복했다. 그런데 어딜 가나 크든 작든 티는 있나 보다. 바로 뒷줄에 앉은 중년 여인의 추임새는 시도 때도 맥락도 없다. 목청도 좋아 마치 내 귀에다 대고 말하는 듯하다. 여인이 바로 내 뒷자리의 오른쪽 자리에 앉은 터라 시인을 바라보면 그녀의 입은 내 귀 쪽을 향할 수밖에 없다. 천성적으로 목소리가 가는 나는 우렁찬 목소리가 부럽긴 하지만 강의 내내 이어지는 여인의 추임새는 소음일 뿐이었다. 그런 방해 요소에도 불구하고 오은 시인의 강의는 세상 속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감동과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기형도 시인의 시를 단물 빠지지 않는 풍선껌처럼 곱씹고 싶어졌고, 문해력 교실의 어르신이 지은 시에선 감탄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과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으로 나눠 설명했다.

     

정여울 작가가 크로노스의 시간을 수학적으로 계산되는 객관적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을 주관적 시간이자 오직 자신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단편적으로 설명했다면 오은 시인은 연대기적인 시간, 오늘이 지나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격무의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있어야만 분초를 생생히 느끼고 그 순간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존재의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서 삶이란 무늬를 그려내는 게 아닐까 싶다.    

  

             사랑

                      허옥순 할머니     

   눈만 뜨면

   애기 업고 밭에 가고

   소풀 베고 나무하러 가고

   새끼 꼬고 밤에는 호롱불 쓰고

   밥 먹고 자고

   새벽에 일어나 아침 하고

   사랑받을 시간이 없더라          <시 전문>


이 시는 ‘성인 문해력 학교’에서 한글을 깨친 허옥순 어르신의 창작시다. 어르신의 삶엔 노동의 시간 (크로노스의 시간)만 있었지 사랑받을 시간(카이로스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뒤늦게 한글을 깨치고 시를 쓰면서 사랑받을 시간이 없었던 당신의 삶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채워가신다.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어르신도 이렇듯 치열하게 당신의 삶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채워가는 데 열중하신다. 그럼 나는 어떤가. 좋은 시절에 태어나 배움의 혜택도 받았고 마음만 먹으면 좋은 강의를 원하는 만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로 게으름을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주어진 일을 해낸 다음에야 글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경험한 어르신. 무학의 어르신이 순하디 순한 글로 풀어낸 시는 그대로 내 맘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삶에 대한 경외감으로 물들일 수 있는 그 힘은 진실함에 있을 것이다. 그 시를 읽으며 내 게으름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던 그 순간을 놓지 않았던 덕에 더 늦기 전에 이 글을 쓴다. 매주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해 스스로를 한심해하고 의기소침해하던 시간이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나를 들볶기만 하며 세끼 밥과 함께 흘려보낸 크로노스의 시간이 오늘 이 글을 씀으로써 카이로스의 시간을 위한 불쏘시개가 됐으리라 위안해 본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써내는 루틴을 되살리고 싶은 발걸음을 다시 조심스레 내디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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