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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May 28. 2023

64. 자주 잊지만, 아주 가끔 떠올리는 사랑의 기억

―너그럽지만 때로는 더없이 사나운 모성

우리는, 아니 나는 자주 내가 얼마나 많은 어른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잊고 살아간다. 뜻하지 않은 좌절에 무릎 꺾인 채 주저앉았을 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여력이 없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의 회오리에 휘말렸을 땐 머리도, 몸도, 마음조차도 모두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폐허 위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형체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것만 같았다. 텅 빈 마음으로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렸을 때 흐릿하게 보이던 건 신기루가 아니었다. 50년 전의 첫 여름방학, 외가의 마당을 가로질러 내게로 뛰어오던 할머니.    

  

밀양 영남루 근처에 있던 외갓집 앞엔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폴짝 버스에서 내려 몇 발짝이면 외갓집 대문이 있었다. “할머니이~” 하고 부르는 첫 외손녀의 목소리에 할머니는 고무신도 제대로 못 꿰어 신고 달려 나오시곤 했다. 그 장면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착각 속에 유영하게 했다.      


그러다 시 수업에서 시를 쓰면서 깨달았다. 손주 사랑이 자식 사랑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외손녀에 대한 반가움보다 내 손을 잡은 당신 딸이 더 반갑고, 사무치게 보고파 할머니의 한쪽 발은 매번 맨발이었다는 걸 반세기 만에야 알게 됐다.      


엄마의 사랑은, 자식을 보고픈 마음은 고무신 신을 겨를조차 아까울 정도라는 걸 엄마는 할머니 생전에 알았을까. 엄마가 쓰러지고 나서야 바늘에 찔리듯 그 사랑을 깨닫게 된 나처럼, 엄마도 할머니가 노환으로 몸져누우셨을 때야 깨달았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 무심함은 엄마 닮아 그런 거라고 변명할 수 있을 테니까.     

 

       어미의 사랑

                                Jasmine     

외가가 있던 밀양

때늦은 방문이었나

옛날 기와집 자리엔

사우나탕 건물이 서 있었지     


가슴 아린 순간 떠오른

일곱 살의 여름방학

나보다 60년 앞서 세상 오신 할머니

평상에 아침상 차려놓고

늦잠꾸러기 손주들 부르던

너그러운 목소리     


그러곤 어미야 어미야 하며

닭 모이를 마당에 뿌렸지     

모이 먹느라 바쁜

병아리들 사이로 지나갈 때면

어미의 사나운 기세에

할머니 호위 없이는

밥상 앞으로 갈 수 없었던

오래전 여름날 아침     


병아리들 지키던

어미의 드센 꼬꼬댁과 푸드덕

그래서 지금도 치킨은

내게 음식이 될 수 없어

아무리 붉은 소스를 입혀도

내겐 모두 어미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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