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자주 잊지만, 아주 가끔 떠올리는 사랑의 기억
―너그럽지만 때로는 더없이 사나운 모성
우리는, 아니 나는 자주 내가 얼마나 많은 어른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잊고 살아간다. 뜻하지 않은 좌절에 무릎 꺾인 채 주저앉았을 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여력이 없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의 회오리에 휘말렸을 땐 머리도, 몸도, 마음조차도 모두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폐허 위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형체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것만 같았다. 텅 빈 마음으로 눈꺼풀을 겨우 밀어 올렸을 때 흐릿하게 보이던 건 신기루가 아니었다. 50년 전의 첫 여름방학, 외가의 마당을 가로질러 내게로 뛰어오던 할머니.
밀양 영남루 근처에 있던 외갓집 앞엔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폴짝 버스에서 내려 몇 발짝이면 외갓집 대문이 있었다. “할머니이~” 하고 부르는 첫 외손녀의 목소리에 할머니는 고무신도 제대로 못 꿰어 신고 달려 나오시곤 했다. 그 장면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착각 속에 유영하게 했다.
그러다 시 수업에서 시를 쓰면서 깨달았다. 손주 사랑이 자식 사랑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외손녀에 대한 반가움보다 내 손을 잡은 당신 딸이 더 반갑고, 사무치게 보고파 할머니의 한쪽 발은 매번 맨발이었다는 걸 반세기 만에야 알게 됐다.
엄마의 사랑은, 자식을 보고픈 마음은 고무신 신을 겨를조차 아까울 정도라는 걸 엄마는 할머니 생전에 알았을까. 엄마가 쓰러지고 나서야 바늘에 찔리듯 그 사랑을 깨닫게 된 나처럼, 엄마도 할머니가 노환으로 몸져누우셨을 때야 깨달았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 무심함은 엄마 닮아 그런 거라고 변명할 수 있을 테니까.
어미의 사랑
Jasmine
외가가 있던 밀양
때늦은 방문이었나
옛날 기와집 자리엔
사우나탕 건물이 서 있었지
가슴 아린 순간 떠오른
일곱 살의 여름방학
나보다 60년 앞서 세상 오신 할머니
평상에 아침상 차려놓고
늦잠꾸러기 손주들 부르던
너그러운 목소리
그러곤 어미야 어미야 하며
닭 모이를 마당에 뿌렸지
모이 먹느라 바쁜
병아리들 사이로 지나갈 때면
어미의 사나운 기세에
할머니 호위 없이는
밥상 앞으로 갈 수 없었던
오래전 여름날 아침
병아리들 지키던
어미의 드센 꼬꼬댁과 푸드덕
그래서 지금도 치킨은
내게 음식이 될 수 없어
아무리 붉은 소스를 입혀도
내겐 모두 어미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