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smine Jul 29. 2023

68. 젊은 날의 아버지

― 50여 년 만에 떠오른 장면

아파트 단지 안 마트에서 장을 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 6시 가까운 시간이긴 했지만 7월의 태양은 여전히 기세등등해 양산을 받쳐 든 상태였다. 장바구니는 무겁고 날은 더워 걸음이 절로 느려진 참이었다. 그때 10m쯤 앞에 부녀로 보이는 남자와 대여섯 살쯤의 여자아이가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딸 : 힘들어서 좀 쉬다 갈래.

아빠 : 그래~.     


아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딸아이가 자리 잡은 곳은 아빠의 오른발등 위였다. 다부진 체격에 운동화를 신은 아빠의 발등에 엉덩이를 잘 맞춰 앉은 아이가 아빠 정강이에 등을 대고 허벅지에 머리까지 기대자 세상 하나뿐인 맞춤 의자가 됐다. 채 1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엔 아빠도 자기 발등에 앉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살짝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빠는 아이 얼굴에 비치는 해를 손으로 가리며 10여m 옆에 있는 놀이터 그늘로 가자고 아이를 구슬렸다. 그런데도 아이는 단칼에 여기가 좋다고 했다. 아마도 더운 날, 한참 윗동 아파트에서 입구 동까지 내려오느라 지친 아이는 가장 빨리 다리 쉼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빠의 발등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한여름 햇살 아래 오른 다리를 아이가 기댈 수 있게 비스듬히 짝다리를 하고 선 아빠와 아빠표 다리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아이를 지나쳐 오는데 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을까. 50여 년 전의 어느 날이 불쑥 떠올랐다.      


내가 학교 입학 전이었으니 여섯 살 때쯤, 충치가 심한 유치를 빼야 할 때였던 듯하다. 여느 때처럼 영화관 앞 양과자점에서 우유와 빵을 사주는 줄 알고 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평상시와 다르게 버스를 타고 아주 번화한 도로변 인도를 걸어가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의아함이 불길함으로 바뀌려던 순간, 치과에 가는 길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아버지 손에서 손을 빼려는 것과 아버지가 내 낌새를 알아차린 건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나는 결국 아버지 손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달랑 안긴 채 발버둥 치며 2층 계단을 올라 치과로 들어갔다.      


평소 수줍음 많고 얌전한 아이였던 나는 병원만 가면 전혀 다른 아이가 됐다. 소아과 가는 길에 이미 울먹이기 시작해 주사실에 끌려 들어가면서는 사나운 얼굴로 소리 지르며 간호사 하얀 가운에 신발 자국을 선명히 남기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날, 소아과보다 더 무시무시한 치과에서 간호사와 아버지의 진땀 쏙 뺀 협업으로 의사는 겨우 이를 뺐다. 그렇게 난리를 쳤으니 며칠을 앓아누웠을 게 뻔한데 그 이후의 기억은 하나도 없고 아버지 손을 잡고 도로변을 걷던 때부터 치과에서 난리를 피웠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 전날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면회한 이후 가슴에 뭔가 얹힌 듯 몸이 무겁던 차였다. 그러다 어린 딸과 아빠를 우연히 마주치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아버지와의 치과행이 떠올랐나 보다. 1주일 만에 요양원에서 만난 아버지는 더 마르고 더 작아져 있었다. 오래전 나를 안아 들고 치과가 있는 좁은 계단을 단숨에 올랐던 아버지가 이젠 누군가의 도움 없인 생활할 수 없는 구순 노인이 됐다. 누구나 노인이 되지만, 나 또한 그럴 테지만 내 아버지의 작아진 몸과 떨어진 총기는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다.      


아버지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2년 6개월 전 엄마가 쓰러지면서부터였다. 총기라면 어디에도 뒤지지 않던 아버지에게 치매가 스며들었다. 노인이 된다는 건 주름살이 늘어나고 머리가 하얗게 세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넘어진 적이 없는데도 약해진 뼈는 앉아 있다 끙, 하며 일어서는 과정에서 골절이 생겼다. 병원에선 압박 골절이라고 했다. 입원하고 회복기를 거쳐 걱정했던 것보다 빨리 좋아지셨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고열로 다시 입‧퇴원을 반복하다 화장실 오가는 게 힘들어져 결국 요양원에 모시게 됐다.      


어떤 날은 면회 갔다가 다른 어르신들과 놀이 프로그램에 열중하는 아버지 뒷모습만 보고 돌아오기도 했다. 어떤 날은 공용 TV 앞 소파의 가장 좋은 자리가 당신 자리이고 그 옆에 전용 식탁도 있다고 우리 부부에게 자랑하는 아버지를 보고 온 적도 있다. 최근에 본 아버지는 가벼워진 몸으로 워커 없이 우리 부부에게 걸어오셨다. 자력으로 걷는 아버지가 반갑기도 하고 위태롭기도 했다. 그러나 단기기억력은 확연히 떨어졌고 큰사위(남편)를 작은사위로 착각하실 정도로 치매는 진행 중이었다.  남편은 보통 키에 날씬한 체형이지만 제부는 키 184cm에 90kg 넘는 거구라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체격인데도 그랬다.


자녀가 셋이어도 아버지 한 분 모시는 게 어려운 시절이다. 내 일상과 아버지의 일상이 그 옛날 내 어린 시절처럼 한 공간에서 이뤄지기 힘든 시대. 뾰족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교차하는 여름날, 따가운 햇볕 아래 손으로 아이 얼굴을 가리고 선 젊은 아빠와 그 아빠의 발등에 앉은 어린 딸을 보며 나보다 몸이 작아진 내 아버지를 떠올린다.     

작가의 이전글 67. 누구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