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고양이는 옳다’
―무거운 머리, 가벼운 입을 가진 우리들
아주 오랫동안 말글 속에서 직장생활을 해왔다. 일의 특성상 주변엔 항상 책이 많았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도 글을 가까이하다 보니 주변엔 자연스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서력이 좋은 글 친구들과 교류하다 보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절로 깨닫게 돼서 좋다. 요즘엔 시를 배우고 있어 더 그렇다. 그러나 뭐든 과유불급이다. 새로운 지식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쌓여가면 어느새 교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러다 낭패를 당하는 결말은 오랜 옛이야기부터 요즘의 동화나 드라마 등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돼 우리를 각성시킨다.
여러 수업을 듣다 보니 회사 다닐 때와 달리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대부분은 현직을 떠난 사람들이다. 간혹 딸뻘의 어여쁜 여성을 만나기도 하지만 막내 삼촌뻘의 전직 교장 선생님, 세계를 누볐던 전직 은행지점장 등 다양하다. 그들이 시를 배우는 이유 또한 제각각이다.
타고난 수재여서 뭐든 배우기만 하면 바로 중급 수준으로 올라서는 수강생이 있었다. 온갖 악기와 댄스를 섭렵하고 새로운 영역인 시 수업을 들으러 온 분이었다. 수업 중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좀처럼 강사님에게 마이크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달변가였다. 아는 것, 잘하는 것이 많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꾸준히 뭔가를 배워온 나는 그런 적이 없었는지 돌아보게 됐다. 그분 덕분에 머리가 무거울수록 입은 가벼워지기 십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또 다른 한 분은 독서광이었다. 시대에 맞춰 새로운 영역을 배우는 데도 열심인 분이었다. 그분의 지식욕은 대단했다. 한 사람이 동시에 그렇게나 다양한 수업을 듣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익을수록 고개 숙이는 벼 이삭을 닮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는 다른 수강생의 말을 자주, 불쑥 끊는 그분과 마주하는 건 그리 즐겁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도 책을 안 읽는다고 고백했다. 책을 읽는 만큼의 교만이 고개를 든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나보다 책을 덜 읽는 사람을 무시한다면 독서를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쩌면 이 또한 독서를 게을리한 나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얄팍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내 옆의 사람을 함부로 단정 짓고 무시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독서를 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세계가 궁금해서 한길만 들이파는 사람도 있고,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듯 이 책 저 책을 소화해내는 사람도 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타고난 재주도, 탁월한 역량도 지니지 못했기에 한 번에 한 가지만 공부하기도 버겁다. 더구나 요즘 배우고 있는 시는 쉽게 곁을 내주지도 않는다. 아니 시가 곁을 내주지 않는다기보다는 내 감성이, 내 마음자리가 몽글몽글한 상태가 아니어서일 확률이 훨씬 높다.
다시 시 수업 과제를 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어느 한때는 기다려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어들 주변을 서성대며 마른 입술을 깨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럴 땐 노트북을 덮고 시집을 펼쳐야 한다는 걸.
마침 집어 든 시집에서 저 먼 나라 영국의 시인 브라이언 패튼이 알려준다. ‘고양이는 옳다’(원제 ‘비본질적인 것들’)는 시에서 시인은 나지막이 전한다. 너무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기억하면서 심장에 금이 가는 우리들보다 하루의 본질적인 것을 기억하는 고양이가 옳다고 말이다. 복잡다단한, 어찌 보면 자디잔 일상의 여러 일과 다양한 사람들에게 즉각적이고 과하게 반응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섣부른 단정도, 타인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삶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삶을 지향함으로써 우리는 깊이 잠들 수 있고, 다음 날을 활기차게 살아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시를 쫓아다니는 게 되려 시를 내게서 더 달아나게 할 수도 있다는 자각이 든다. 이번 생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시를 읽으며 이쪽저쪽으로 뻗어나가는 생각을 가지치기한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시에 대한 열망을 제외한 것들을 마음속에서 내보낸다. 그래서 오늘 밤은 고양이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들 것이다.
고양이는 옳다
브라이언 패튼
날마다 고양이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추위를 피해 안으로 들어가는 길,
가장 따뜻한 지점과
먹을 것이 있는 위치를 기억한다.
고통을 안겨 주는 장소와 적들,
애를 태우는 새들,
흙이 뿜어내는 온기와
모래의 쓸모 있음을.
마룻바닥의 삐걱거림과 사람의 발자국 소리,
생선의 맛과 우유 핥아먹는 기쁨을 기억한다.
고양이는 하루의 본질적인 것들을 기억한다.
그밖의 기억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
마음속에서 내보낸다.
그래서 고양이는 우리보다 더 깊이 잔다.
너무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기억하면서
심장에 금이 가는 우리들보다. <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