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푸른색의 기억
― 허연 시인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 연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시 전문>
여기 한 소년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이지요.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너무나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일까요. 한때는 시를 쓰며 배고픔을 잊기도 했지만 외로웠던 소년. 그 소년을, 시인을 치장하던 푸른색이 사라진 지금 그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라 말하는 남자는,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자신을 아프게 인식하는 듯합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삶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와 자세를 유지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지요. 아이 때 아이답고 어른이 되어선 어른다움을 유지하는 일,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아는 지금, 나는 소녀와 여인 사이 어디쯤 와 있을까요? 누구나 겪는 삶의 여정에서 무릎 꺾인 채 울고 불고 했던 지난 몇 해를 돌아보면 어른이 되는 걸음은 평지를 걷듯 성큼성큼 내디뎌지진 않나 봅니다.
허연 시인의 시는 중년의 내가 진정 어른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으리라던 초심은 얼마만큼이나 지켜졌을까요. 무례한 상사의 모욕적 언사에 사직서 던지고 못 마시는 술 마시며 분노를 토하다 응급실 실려 갔던 일이 떠오릅니다. 중간 간부의 중재로 상사에게 직접 사과와 함께 사직서 돌려받고 사흘 만에 다시 출근하던 날 아침의 찝찝한 기분. 다시 돌아가면 더 좋은 선택지를 찾을 수 있을까, 여전히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상금에 눈멀어 실적을 조작해 온 직원을 징계했던 일, 일보다 술자리 정치에 더 진심이었던 직원을 멀리했던 일 등으로 감당해야 했던 직(職)의 무게는 지금도 때때로 꿈자리를 어지럽힙니다.
주름이 생기는 만큼, 머리가 세어지는 만큼 삶을 보는 눈이 밝아진다면, 누가 나이 들어가는 걸 마다할까요. 경력이 쌓이고 지위가 올라갈수록 자기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해하는 사례들은 눈 감고 귀 닫아도 널려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을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을 시인은 ‘나쁜 소년이 서 있다’고 한 게 아닐까요.
저는 다시 자식의 시간을 건너고 있습니다. 치매인 아버지, 뇌출혈 후유증으로 자식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와병 중인 엄마를 친정집으로 모셔 오려합니다. 먼저 집으로 모신 아버지는 따뜻한 아파트에서 안정적으로 지내시나 했더니 당신 몰래 보일러 온도를 몇 도 낮춘 요양보호사에게 크게 화를 내셨다지요. 이에 놀란 요양보호사는 제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추위에 민감한 아버지는 당신 허락 없이 보일러 온도를 낮춘 요양보호사가 괘씸했던 거지요. 여전히 단단한 어른이 되지 못한 저는 요양보호사를 다독이지도 못하고, 그게 당신 일 아니냐고 묻지도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친정집을 나섭니다.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어대는데 하늘은 어쩌자고 이리 쨍한지요. 그 쨍한 햇살을 받으며 저만치 떨어진 곳에 나쁘지도, 단단하지도 못한 여린 소녀가 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