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smine Dec 15. 2020

7. 동화 속 마녀의 비밀

오래전 극장에서 3D로 애니메이션 라푼젤을 봤다. 과제가 아니었다면 그 당시 내가 애니메이션을 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내게 익숙지 않은 장르였다.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은 라푼젤은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 스토리텔링을 배우는 도중에 영화관에서 본 라푼젤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1810년대에 이런 이야기를 묶어낸 독일의 그림 형제에게 경외심이 들 정도로 이야기의 힘은 강렬했다.     


스토리텔링을 배우면서 수업에 응용되는 옛이야기들의 잔인함이 내내 거슬렸다. 계모가 전처 자식을 죽이거나(장화홍련전), 아이들이 마녀를 죽이고(헨젤과 그레텔), 떡을 줬는데도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떡장수 엄마 이야기(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등등.


수업 시간에 선생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동화 내용이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잔인하지 않냐고. 또 아무리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지만 스토리에 너무 빈틈이 많지 않냐고. 그때 선생님의 답변은 정말 놀라웠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엘렉트라 콤플렉스도 결국엔 자식이 동성 부모에게 느끼는 살의에 가까운 증오다. 그건 이성적 인간이 되기 전 아동기에 형성되는 무의식적 감정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윤리 도덕에 의해 그 무의식이 수면 아래 잠재해 있을 뿐, 언제든 어떤 계기가 생기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그 무의식이 현실 세계에서 비극으로 드러나지 않게 잘 풀어가도록 돕는 게 바로 옛이야기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동화 ‘라푼젤’의 마녀는 바로 라푼젤의 엄마 안에 있는 또 다른 엄마의 모습이며 결국 탑에서 마녀가 떨어지는 장면에서 아이들이 죄책감 없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 위해 엄마에게서 나쁜 엄마 영역을 마녀로 분리해 동시에 등장시킨 것이라는 얘기에 모든 수강생에게서 동시에 탄성이 새나왔다.      


또 동화를 전개해 나가면서 빈틈을 두는 이유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싫어하는 반찬을 먹어야 하고, 이도 닦아야 하고, 문제집도 풀어야 하고, 욕설도 지 말아야 하는 등의 스트레스-를 상상 속에서 맘껏 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동화책에서 계모가 응징당하거나, 아이들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사람을 죽게 하는 등의 내용을 읽으며 자기 안에 쌓인 엄마, 아빠의 부정적인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     


너무나 도덕적인 사회지도층 부모에게서 자란 자식들이 자연스럽게 풀어내지 못한 성적인 억압이나 스트레스로 사춘기나 성인이 돼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것도 가정이나 학교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적절하게 풀어내지 못한 탓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놀아줄 때 부모는 아이에게 많이 맞아주고 일부러라도 져주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리라. 복싱놀이를 하면서 아이가 맘껏 아빠를 때리게 하면 아이는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게 되고 놀이가 끝난 뒤엔 살짝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실생활에선 더 예의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다는 것. 엄마가 총싸움 놀이에서 총 맞고 실감나게 죽는 연기를 한다면 잔소리쟁이 엄마에 대한 아이의 스트레스지수는 뚝 떨어진다.      


이렇게 동화 안에는 인간의 본능과 무의식 등 간단치 않은 심리학, 정신의학이 숨어 있다. 라푼젤을 보면서, 내가 부모 말 잘 듣는 맏딸, 공부 잘하는 학생, 성실한 사회인 등 ‘역할’에 충실한 사람으로 사느라 자연인으로서의 ‘나’로 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때로는 길에 침을 뱉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선 빨간불일 때도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러질 못했다. 이미 아이 때부터 온갖 사회도덕적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세상에 큰일이 나는 줄로 배웠고 그걸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그 어디에서도 내 맘대로 편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갖지 못했으니 세상사는 일에 필요 이상으로 긴장해야 했다. 그러니 아이답게 실수도 하고 어리광도 부리는 시기를 알아서 건너뛰었다.      


상류 문화와 하류 문화가 공존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 심리에 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오페라뿐만 아니라 술집이나 노래방에서 미친 듯이 내지르는 노래도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미술관에서 격조 있게 명화를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낙서하듯 그리는 그림이 더 큰 위안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라푼젤을 보면서 마녀가 바로 엄마임을 인지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지 알았다.  어린 시절 읽은 계몽사의 이야기책은 너무나 계몽적이었다. 내가 성인이 돼 옛이야기의 빈틈을 싫어했던 것도 어린 시절 만화책을 금지당했던 게 그 바탕이 됐으리라. 유일하게 내가 볼 수 있는 만화는 매월 구독했던, 육영재단에서 발간하는 ‘어깨동무’에 실린 아주 적은 분량의 계몽적인 만화가 전부였다. 초등시절 살던 아파트 학부모들이 동네 만화방에 아이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서로 감시자 역할을 하기로 연대하면서 그 시절 그 아파트 살던 아이들은 만화방을 드나들기 어려웠고, 소심한 나는 만화방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생기 넘치는 아이들은 반 친구를 통해 만화책을 빌려 읽기도 했고, 부모 모르게 사소한 일탈을 하기도 했다. 그게 아이들의 특권인데 겁 많은 난 꿈도 꾸지 못했다. 만화 속 빈틈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때 우리의 무의식도 건강해질 수 있다. 만화책을 통해 상상 속에서 날아다니고, 시공간을 오가는 경험은 그래서 중요하다.    

  

라푼젤을 보고 나니 스토리텔링 수업이 더 흥미진진해졌다. 사춘기를 격렬하게 겪은 사람은 부모가 돼서도 사춘기 자녀들에 대한 이해 정도가 높다. 자녀를 부모가 짜놓은 틀에 가두려는 시도는 주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란 부모가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라푼젤을 관람한 이후 의도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려고 노력했다. 남들은 맘껏 즐기는 문화 행위를 나는 내 안의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해 공부하듯이 봤다. 굳어진 뇌를 말랑말랑하게 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로라도 내 문제를 알고, 이해하고, 그 문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 과정이 바로 내게는 건너뛴 어린 시절을 다시 사는 길이었고, 앞으로의 인생을 나만의 속도로 한 걸음, 한 걸음 흔들리지 않고 내딛는 일이기도 했다.

작가의 이전글 6. 생존요가를 만나기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