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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Dec 14. 2020

6. 생존요가를 만나기까지

     

서른이 될 때까지 운동이라곤 해본 적이 없었다. 몸이 뻣뻣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중시절 무용시간의 아픈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무용 수업 초반 워밍업 시간에 앉아서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그래봤자 겨우 90도이긴 했지만-상체를 바닥으로 숙이는 동작을 하는데 어느 틈엔가 두루뭉술한 몸매의 무용샘이 엉덩이로 내 등을 밀면서 스쾃 하듯 앉는 만행을 저질렀다. 60kg 가까운 체중에 눌려 비명을 지르는데도 무용샘은 반동을 주기까지 하면서 날 고통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척추 어디쯤인가는 부러지고 오금은 찢어질 것 같은 시간이, 사실은 1분은커녕 30초도 되지 않았다는 친구들의 증언이 없었다면 무용샘에 대한 증오는 꽤나 오래갔을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운동과 담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운동 좋아하는 사람과도 친해질 수 없었다.     

 

여고 때 적성에 맞지 않는 이과 공부를 하면서 습관적으로 체했다. 그때는 명치나 배가 아픈 게 아니라 편두통이 심해 그게 체증이라는 걸 몰랐다. 대학에 가서야 그게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장애라는 걸 알았다. 졸업하고 취업하면서 좀 덜하긴 했지만 불편한 자리에서 밥을 먹거나 하면 단 한 숟가락에도 체하곤 했다. 운동이 약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당시 한창 유행하던 에어로빅 수업에 등록했다. 동네 목욕탕 건물의 한 층은 목욕탕, 그 위층은 에어로빅 강의실이었다. 에어로빅 수강생은 목욕탕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게 좋았다.      


수업 첫날 시간에 맞춰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음악소리가 바깥의 소음을 모두 삼킬 만큼 컸다. 귀에 익은 신나는 리듬에 나 같은 몸치도 절로 몸이 움직여질 것 같았다. 기존 회원들은 이미 에어로빅복을 입고 몸을 풀고 있었다. 그들은 넉넉한 몸매뿐만 아니라 휘황한 에어로빅복으로 왕초보인 내 기를 죽였다. 호피무늬, 얼룩말무늬 에어로빅복에 레슬러들이 할 법한 벨트를 허리에 조여 맨 당당함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강사가 거울 앞 중앙에 자리를 잡자 벨트를 한 중년 수강생 4-5명이 첫 줄에 자리를 잡고, 그다음 줄엔 조금 젊은 여성들이, 맨 마지막 줄은 첫눈에 봐도 나 같은 왕초보 수강생들이 섰다. 강사가 음악 볼륨을 좀 더 높이면서 수업이 시작됐다. 강사의 동작은 정말 파워풀하면서도 각이 살아 있었다. 부러움과 한숨이 동시에 새나왔다. 등록할 땐 분명 어렵지 않다고 했는데 팔, 다리를 따로따로 움직여야 되는 게 나 같은 몸치가 한 번에 보고 따라 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5분도 안 돼 강의실을 나갈 수도 없었다. 사방천지가 거울이었고 수강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음악이 고조되고 베테랑들은 강사와 보조를 맞춰 온몸을 격렬하게 흔들기도 하고 오른쪽 왼쪽으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맨 뒷줄에 선 나는 바로 앞사람 동작을 보고 따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존 수강생들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반 박자, 아니 한 박자 느린 나는 그 자리에 있다 놀란 듯이 오른쪽으로 옮겨가지만 그땐 이미 베테랑들은 왼쪽으로 가 있으니 맨 뒷줄에 섰는데도 거울에 엉거주춤한 내 모습이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빠른 리듬에도 베테랑 수강생들은 온몸과 영혼으로 음악과 춤을 즐기는 모습인데 나는 허둥지둥, 몸 개그가 따로 없었다. 길고 긴 40분 수업이 끝나자 급 체력 저하가 왔다. 에어로빅 베테랑들은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난 뒤의 개운함으로 서로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진땀을 뺀 나는 피곤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래도 씻으면 좀 나을 것 같아 수강생들과 같이 목욕탕으로 내려가 탕에 몸을 담갔다. 이번엔 어지럼증이 일었다. 서둘러 샤워만 하고 밖으로 나와 바깥공기를 쐬었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밀려왔다. 10분 거리의 집까지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빵집이 보였다. 평소 빵은 먹지 않지만 그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밤식빵을 사서 그 자리에서 손으로 크게 뜯어 한입에 욱여넣었는데 목이 막히는 바람에 계산도 하지 않은 우유를 뜯어 한 모금을 마셨다. 그렇게 숨을 돌리고 보니 식빵은 절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채 못 채우고 에어로빅 체험은 끝이 났다.     


그러다 서울로 직장을 옮겨왔고 몇 개월 지나자 다시 체증이 반복됐다. 이제 무슨 운동을 해야 하지? 수영을 해보자. 왕초보 3개월 과정에 등록했다. 처음 일주일은 수영장 테두리에 앉아서 발차기를 했다. 그다음 일주일은 수영장 테두리를 손으로 짚고 엎드려서 발차기를 했다.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그다음엔 팔로 물 젓는 연습을 하고, 그다음엔 한 자리에 서서 음~파~하며 머리를 돌려 숨 쉬는 연습을 했다. 한 달이 다돼서야 수영은 종합예술이라는 강사의 말처럼 팔 젓기와 발차기, 음~파~를 종합하는 순간을 맞았다. 그런데 어라! 다른 수강생들은 물에 떠서 몇 미터씩 움직이는데 나는 여러 동작을 종합하는 순간 가라앉았다. 음~파~의 순서가 헷갈리기까지 하면 코로, 입으로 락스 물이 들어왔다. 아예 숨을 참고 발차기만 하면 가라앉지 않고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가는데 손을 움직이고 음~파~를 시도하는 순간 물을 먹고 가라앉으니 입으로, 코로 들어간 물 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내게 종합예술은 무리구나. 그렇게 자유형은 끝내 배우지 못하고 접었다.     


에어로빅에 이어 수영까지 낙오되고 보니 오기가 생겼다. 그때 회사 선배가 스쿼시를 권했다. 테니스보다 채도 가벼워서 엘보 걱정도 없을 거 같아 스쿼시 강좌에 등록했다. 강사는 라켓 잡는 법, 공 치는 법, 스텝 밟는 법 등을 시연한 다음 공을 계속 던져줄 테니 2분만 치라고 했다. 2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1분도 못 채우고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강사는 그 나이에 2분도 못 뛰면 어떡하냐고 했다. 강사는 걱정스레 한 말일 수도 있으나 내 귀엔 내 저질체력을 한심해하는 것으로 들려 채로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결국 스쿼시도 한 달 만에 포기했다.     


이제 뭘 하지 고민하던 그때 회사 노조에서 강사를 회사로 초빙해 요가 수업을 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비용도 저렴하고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데다 회사에서 하니 이동시간도 절약할 수 있어 이래저래 좋았다. 드디어 요가 수업 첫날, 바르게 앉는 법을 배우고, 호흡을 배우고, 잘 돌아가지 않던 목을 돌리고, 뭉친 어깨를 풀어내면서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하며 요가에 빠져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회사 동료들의 몸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뭉치고 굳어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끙끙 소리가 새 나왔다. 그런데 주 3회 수업하고 2주도 지나지 않아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잘 돌아가지 않던 고개를 마치 기름을 바른 듯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체증에서 벗어났다. 단 2주 만의 변화였다. 요가는 나를 살리는 운동이 됐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나는 누구보다 빨리 요가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1, 2분 정도의 명상만으로도 깊은 이완에 이르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몸속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게 차크라가 열리는 느낌이라는 건 뒷날 요가명상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됐다.       


요가를 만난 후 난 다른 사람이 됐다. 요가 수업이 없는 날도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 요가 동작을 하는 게 즐거웠다. 요가 수련이 뻣뻣한 내 몸을 유연하게 하는 것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마음도 말랑말랑 해지는 것 같았다. 2개월쯤 지난 어느 날 요가샘이 누운 상태에서 위로 뻗은 두 팔과 양다리로 바닥을 밀면서 허리와 머리를 들어 올려 아치 모양을 만드는 자세를 보여줬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사람의 몸이 요가 수련으로 저렇게 아름다운 포즈를 연출할 수 있구나. 수업이 끝나고 요가샘과 점심을 먹으면서 그랬다. “내가 그 동작이 된다면 떡을 돌릴 텐데,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그러고 두 달 후 어느 날 그 아치 자세를 하는데 그전까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던 머리가 무겁게 들렸다. 아치라기보다는 책상 자세 비슷했을 테지만 머리가 바닥에서 위로 들어 올려지던 그 순간의 느낌과 감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 점점 아치 자세는 모양을 잡아갔고 머리가 팔심으로 들어 올려지는 게 아니라 척추의 힘,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코어의 힘이라는 걸 알았다. 그 무렵, 나는 어딘가에 얽매여 있는 것 같았던 내 삶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약속대로 떡을 돌렸다. 그 말을 했을 때 내가 아치 자세를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1도 하지 못했다. 그때 그 경험이 지금 나를 글쓰기의 세계로 이끈 최초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동신경 제로, 운동감각 제로인 내가 4개월 만에 그 자세를 하자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건 좋은 자극제가 됐다. 그때 요가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요가는 나를 살아 숨 쉬게 했다. 그 무렵엔 만나는 사람마다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연애하지요? 남자 생겼지? 40대 맞아? 얼굴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몸과 마음은 따로가 아니었다. 요가 수련으로 몸이 건강해지면서 마음의 근육도 생겼다. 내 안에 밝은 에너지가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요가한 햇수가 늘어날수록 요가가 좋았고 궁금했고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결국 몇 년 후 요가명상학과의 문을 두드렸다. 3학년에 편입해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었다. 새로운 세상은 넓고도 따뜻했다. 요가 공부에서 손 뗀 지 10년이 다 돼 가지만 ‘삼스카라(잠재인상-몸과 마음의 기억)’라는 단어는 잊히지 않는다. 요가를 처음 접하면서도 전혀 낯설지 않았던 것, 다른 수강생은 금방 이해하지 못했던 요가샘의 설명이 단박에 이해됐던 이유를. 뭔가를 우연히 처음 접했는데 금방 익숙해지는 경험, 그건 전생의 어느 순간 경험한 일이라는 것, 그게 생이 바뀌어서도 그때의 느낌이나 익숙함을 기억해내는 거라는 걸. 그걸 현대 과학에선 ‘신경가소성’이란 용어로 설명한다.      


그렇게 요가에서 명상으로 내 안의 나무는 계속 가지를 뻗어나갔다. 그렇게 10년을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다시 슬럼프다. 몸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눈이 말썽을 부리고, 팔꿈치가, 무릎이, 허리가 힘들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이젠 안다. 나는 또 길을 찾을 것이다. 코로나가 아무리 극성이어도 그 끝은 분명 있을 것이고 그 끝이 바로 새로운 시작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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