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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Sep 22. 2024

94. 안부를 묻는 일

― 김초혜 시인의 ‘안부’

                  안 부

                                 김 초 혜


    강을 사이에 두고

    꽃잎을 띄우네     

 

    잘 있으면 된다고

    잘 있다고      


    이때가 꽃이 필 때라고

    오늘도 봄은 가고 있다고     


    무엇이리

    말하지 않은 그 말          <시 전문>         

 


아주 오랫동안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있었다. 무려 26년이었다. A와 연락이 끊긴 건 1998년 2월 IMF로 다니던 회사가 휴업한 후였다. 각자 살길을 모색하느라 서로 안부를 챙길 여유가 없었다. IMF도, 휴업도 내 예상에는 없던 일이었다. 내가 부산을 떠나기로 한 건 실직만큼이나 큰 이변이었다. 외삼촌 세 분이 모두 서울에 살았기에 며칠 신세 질 언덕은 있었다. 준비한 이력서 5통이 내 손을 떠났을 때, 더는 뭘 더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때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삶이 ‘사다리 타기’ 같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그때 내가 서울로 오지 않았다면 내 삶의 좌표는 지금과는 아주 먼 곳에 찍혔을 것이다. 삶의 묘미는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에 있다. IMF에 등 떠밀려 서울에 온 게 맞나 싶을 만큼 나는 서울살이가 재미있었다. 서울말을 구사하는 동료들은 내가 휴가를 내고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시골 가느냐’고 살갑게 물었다. 그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부산은 시골이 아니라 제2의 도시라고 부산말로 답했다. 그런 순간에도 나는 서울 촌놈들인 그들이 밉지 않았다.

     

서울살이에 익숙해질수록 유독 생각나는 동료가 바로 A였다. 차가운 듯하지만 속정 깊고 의리 있는 사람, A의 안부가 궁금했다. 연락이 닿는 예전 동료들을 수소문해도 A의 소식을 들을 길은 없었다. 그러던 중 엄마가 쓰러지고 돌아가시기까지 3년 6개월을 반쯤은 나사가 빠진 사람으로 살았다. 그 와중에도 A가 와락 보고 싶었다. 그 시절 같은 직장에 다녔던 후배를 만나 그리움을 토로했다. 후배도 다른 동료를 통해 A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엄마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30여 년 만에 아주 친했던 여고 동창을 수소문해 만난 사연을 들려줬다. 그런데 그 동창생의 현재가 너무 팍팍해서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더 늦기 전에 A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A가 어떤 삶의 여정에 있을지 알 순 없지만, A를 만나야겠다는 열망은 더 커졌다. 그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A가 잘 살고 있다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싶었고, 나 또한 그럭저럭 잘 살아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도 A의 남편 이름과 직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력이나 암기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내가 그걸 26년이나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몇 사람을 건너 A의 남편 회사 연락처를 찾았다. 나에 대한 소개와 A를 만나고 싶다는 내용을 짧지만 간절하게 문자로 보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서성대던 시간이 꽤 지난 뒤에야 A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문자로 왔다. 그토록 오래 그리워한 이름 석 자와 전화번호였다.    

 

전화를 걸고 연결음이 이어지던 그 몇 초간 심장은 제멋대로 벌렁댔다. 드디어 들린 A의 목소리.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A도, 나도 서로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A는 회사가 휴업한 뒤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유학을 다녀온 뒤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고 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어 서울이나 인천으로 자주 온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부산으로 내려가겠다는 나를 A가 말렸다. 곧 서울에서 통역 일정이 있으니 그때 만나자고 했다. 우리는 26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가뿐히 뛰어넘었다.    

  

더위가 여전하던 8월 말, A를 여의도에서 만났다. 나도, A도 외양은 변했지만 타고난 성정엔 변화가 없었다. A는 내가 자신을 찾는 게 조금은 의아했다고 한다. 그 시절, A의 삶은 꽤 고단했다. 20대 중반에 A는 결혼을 한 상태였고, 자식 사랑이 유별난 부모님과 살던 나는 옷 욕심 많은 철부지였다. 친정, 시댁 양가 어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했던 A의 삶은 팍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A에게 나는 그리 마음 가는 동료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게 A가 오래도록 보고 싶은 사람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성들이 많은 부서일수록 무리를 만들고 자기 무리 밖의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경우를 자주 봐왔다. A는 그런 유의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오래 A를 그리워했던 데는 A가 그런 시류에서 벗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26년이란 시간이 우리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지만, A의 말투는 여전했다. 우리 모두 얼굴에 주름이 늘고 몸도 한 치수 불었지만, 마치 한두 달 전에 봤던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사이 6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기차 시간 때문에 마지못해 커피숍을 나서면서 9월 말에 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긴 시간 시시때때로 진국 같은 A를 떠올리며 궁금했던 안부를, 얼굴을 보며 물을 수 있어 행복한 마음으로 9월을 맞았다.


추석 연휴에 엄마가 쉬고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안부’란 시를 마음으로 읊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안부를 물을 수 있을 때, 바로 그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번 주말 다시 A가 서울로 온다. A와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게 될 그 모든 이야기 중 가장 최고는 A도, 나도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리라. A에게 안부를 물을 날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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