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와 고단함마저도 잠시 잊게 만들 만큼 푸근하고 든든했다
능주는 드들강을 따라 남평에서 화순으로 가는 길목, 조용히 우회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인구가 사천여 명 남짓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화순을 대표하는 고장이다. 조선시대에는 능주목으로 승격되어 화순현보다 두 단계나 높은 목사가 다스리던 지역이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관광지가 많지 않던 시골에서 영벽정, 드들강, 운주사, 주먹 바위, 고등 바위(지금은 남근석이라 불린다) 정도가 유일한 명소였다. 초등학교 학생 수만 해도 팔백 명쯤 되었기에, 학년별로 나뉘어 떠나는 봄·가을 소풍은 늘 한정된 장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꿈과 낭만을 심어준 곳은 다름 아닌 능주의 영벽정이었다. 연주산의 사계절 풍경이 맑은 지석강 물 위에 투영되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이곳은, 옛 궁인들이 활을 쏘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들의 단정한 자세와 단단한 눈빛은 어린 내게 넘볼 수 없는 세계처럼 느껴졌다. 동경과 경외가 뒤섞인 채, 나는 한참을 그 풍경 속에 머물곤 했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드들강 상류, 지석강이 마을 앞을 길게 감싸 흐르는 곳이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강물은 우리들의 놀이터였고, 그 물빛은 투명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그 속에는 쏘가리가 살았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쏘가리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맑은 자연 속에 살았는지를 말해준다.
지석강을 따라 능주까지 이어지는 둑은 본래 홍수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자연스레 길로 쓰였다. 잔디가 푸르게 자라고, 하늘엔 뭉게구름이 솜털처럼 흘렀다.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속 시골 풍경처럼, 이상적인 한 장면이 현실이던 시절이었다.
장날은 마을 전체의 축제였다. 각 마을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이어 장터로 향했고, 최고의 교통수단은 소가 끄는 달구지였다. 소는 주로 쟁기질에 쓰였지만, 형편이 되는 집에서는 달구지를 달아 교통수단으로 활용했다. 우리 마을 양전 아제는 달구지를 가진 분이었는데, 그의 눈에 들면 장날에 달구지를 얻어 탈 수 있는 행운이 따라왔다.
능주장은 오일장이었고, 농촌 생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었다. 농기구와 비료 같은 농자재는 물론이고, 채소와 반찬거리도 이곳에서 구입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 장에 자주 다녔다. 당시의 소는 한 가정의 재산 목록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고, 소 한 마리를 사려면 논 두 마지기를 팔아야 했다. 소를 사고파는 ‘소전’이 따로 있었고, 그 사이에서 중개를 업으로 삼는 이들도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네 남매를 혼자 길러야 했다. 여자의 몸으로 뚜렷한 소득을 얻기는 어려웠고, 어머니는 농사와 함께 닭과 돼지, 소를 키우며 생계를 이으셨다. 당시 농촌의 삶은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집 가까이에 가축을 기르다 보니 위생 상태는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동남아 여행 중, 파리떼가 시커멓게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고향 생각이 났다. 전혀 낯설지 않았다.
어머니가 소를 사러 가실 때는 작은아버지가 꼭 동행하셨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로 큰일은 항상 작은아버지의 손을 빌려야 했다. 소전에서 좋은 소를 고르고, 흥정을 벌이다 보면 이내 적당한 가격에 합의가 이루어진다. 계약이 끝나면,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중개인까지 모두가 함께 식당에 들러 국밥 한 그릇씩을 나누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때 먹었던 능주장 국밥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커다란 솥에서 펄펄 끓는 국물, 듬뿍 담긴 돼지고기와 선지, 순대. 어머니와 작은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국밥 한 그릇은 추위와 고단함마저도 잠시 잊게 만들 만큼 푸근하고 든든했다. 그날의 기억은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아, 오늘도 힘들 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 시절 능주, 그 장터, 그 국밥은 내 삶의 가장 따뜻한 연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