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설날 아침이면 먼저 큰집에 세배를 다녀오라고 가르치셨던 어머니

by 문운주

어머니는 설날이 되면 늘 새 옷과 새 신발을 사 주셨다. 신발은 검정 고무신이었고, 운동화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좋은 옷은 언감생심 생각도 못했지만, 새 신발을 신는 일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기쁜 마음에 방 안에서도 새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고, 코르덴바지에 점퍼까지 챙겨 입은 뒤 이리저리 거울을 들여다보곤 했다.


아버지는 삼남 이녀 중 둘째셨고,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설날 아침이면 먼저 큰집에 세배를 다녀오라고 늘 가르치셨다. 우리 마을은 문가 집성촌이라, 늦게 가면 큰집 어른들이 또 다른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러 떠나는 터였다. 나는 먼동이 채 트기도 전, 새벽 공기를 가르며 큰집을 찾았다. 큰아버님께서 잠결에 나오시던 모습도 아직 기억난다.


“자식에게 하는 것의 십 분의 일만 부모에게 신경을 써라.”


큰아버님의 그 ‘주옥같은 말씀’은 당시의 나에게는 어려웠고, 솔직히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다. 형님들이나 당숙들 역시 틈만 나면 빠져나갈 궁리를 했고, 이를 아시는지 큰어머니는 떡국상을 내오며 큰아버님께 눈짓을 보내 말씀을 멈추게 하곤 하셨다.


큰어머님의 떡국은 특히 독특했다. 닭을 뼈째 곱게 다져 장에 조려두었다가 조금씩 넣어 끓이셨는데, 담백하면서도 사각사각 씹히는 식감이 일품이었다. 짭짤한 감칠맛이 오래 남았고, 지금도 설날이면 그 맛과 큰어머님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설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성묘였다. 집안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산소를 찾는 일이 먼저였다. 절골, 원동, 상잠 등 곳곳의 산소를 향해 신작로와 강변, 계곡과 비탈길을 지나 걸어 올라갈 때면 묘한 정복감이 들 정도로 즐거웠다.


깊은 산속에서 묘소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기도 했고, 벌에 쏘여 얼굴이 퉁퉁 붓기도 했다. 산 자락 따라 이어졌을 길은 소나무와 가시덩굴, 억새가 우거져 사람 발길이 끊긴 지 오래였고, 축축한 습기와 모기 떼가 따라붙었다. 길이 산이 되고,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름이면 어김없이 벌초를 하고, 명절이면 성묘를 했다. 불편은 매년 반복됐지만 어느새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당숙들과 사촌 형제들이 족히 십여 명씩 모여 다녔다. 줄지어 산을 오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했다.


성묘가 끝나면 작은집에 모여 점심을 먹거나 놀이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성묘에 오지 못한 친척들까지 대부분 작은집으로 모였다. 작은집은 늘 아늑하고 따뜻해 사람들로 북적였다. 작은아버님은 우리가 편히 어울리도록 슬쩍 자리를 비켜주시곤 했고, 작은어머님의 구수한 입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사철가를 흥얼거리며 들려주시던 목소리도 지금은 더없이 그립다.


이제 설날이 내일모레다. 어느덧 당시의 부모님 나이를 훌쩍 넘겼지만, 해가 갈수록 그리움은 더해만 간다. 큰아버님의 잔소리(?)도, 큰어머님의 떡국 맛도 다시는 들을 수도 맛볼 수도 없다. 작은어머님의 구수한 이야기와 사철가 또한 이제는 마음속에서만 되살아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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