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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이 선물해 준 평화

자연과 하나 되어 가는 일상

by 봄이

요즘 나는 사람보다 나무를 더 자주 본다.

유일한 대화상대인 모모(남편)와는 관심사가 많이 달라, 함께 밥을 먹거나 장을 보러 나가는 일을 제외하면 각자 시간을 보낸다. 그는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나는 정원에 있는 시간이 많다. 같은 집에 살아도 대화는 드물다.

이곳에 아는 이도 없어 외부 약속은 없다.

낯설고 조용한 이곳에서 나는 예전과 전혀 다른 삶의 결을 배워가고 있다.


우리는 영국 웨일스 시골 작은 마을에 산다. 창밖 저 너머에는 대서양이 펼쳐진다. 날씨에 따라 색을 바뀌는 바다, 들판 위를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 가끔씩 저녁이면 세상을 물들이는 노을, 노을빛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하루가 참 조용히도 흘러가고 있음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이 마을에서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이다. 처음엔 낯선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시선조차 하나의 풍경처럼 느껴진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조용히 인사를 나누는 이웃들, 매일 나를 반겨주는 들꽃과 풀잎들, 사람보다 자연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이곳에서, 나는 조금씩 나와 가까워지고 있다.

요즘엔 정원을 가꾸는 시간이 가장 소중하다.
꽃을 옮겨 심고, 식물들을 들여다보며 흙을 만지고 있으면 시간은 금세 흐른다.

비 온 뒤의 흙냄새, 잔디를 깎은 뒤 올라오는 싱그러움, 새싹이 돋아나는 초록의 기척, 피어나는 꽃잎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린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나는 이 정원에서 조용히 나를 돌보고 위로받는다.


10월이면 예순이다.
연배가 더 있으신 분들에겐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몸은 예전 같지 않다. 허리에 군살이 붙고, 흰머리도 부쩍 늘었다. 하지만 이 고요한 시간 속에선 그저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어쩌면 조금씩 자연을 닮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도시는 멀고, 사람은 드물다. 대신 자연은 늘 곁에 있다.
새벽이면 안개가 언덕을 타고 내려오고, 대낮엔 들새가 지붕 위를 지난다.

누구의 눈치도, 서두를 이유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

누군가는 이런 삶을 단조롭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이 단조로움은 쉼이고, 평화이며, 자유다.
바쁘게 살아가던 시간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이곳이 하나씩 되돌려 준다.

혼자인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를 더 잘 알게 된다.
그리고 이 단순한 날들이 쌓일수록, 삶은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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