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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 호박죽

영국 소소한 일상

by 봄이

이곳 마트에서는 할로윈이 끝나면, 그동안 팔지 못한 호박을 떨이로 내놓는다. 성인 머리만 한 크기의 호박들이 박스째 마트입구에 쌓여있다. 한 덩어리에 무조건 50P(한화로 800원 정도)여서 개중에 작고 단단한 것들을 몇 개 골라와 적당히 잘라 소분해 냉동고에 보관해 둔걸 깜빡 잊고 있었다. 장 봐온 냉동식품을 정리하다 소분된 호박봉지를 발견하고는 점심으로 호박죽을 끓였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먹었던 호박죽은 내가 많이 아팠던 9년 전, 1년간 휴직을 하고 서울에서 병원생활을 할 때다. 3박 4일간 항암과 방사선을 받고 시골로 내려가 엄마집에서 열흘정도 몸을 회복하고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치료받기를 반복하던 때, 긴 항암으로 입맛을 잃어가면서 병원밥을 전혀 먹지 못했던 나는 치료가 끝나 집으로 가던 길에 먹고 싶고, 생각났던 음식이 어릴 적 엄마가 자주 해주셨던 호박죽이랑 무청시래기된장국이었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엄마는 직접 수확한 잘 익은 늙은(맷돌) 호박에 호랑이콩을 넣어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종종 호박죽을 끓여 주셨다. 무청시래깃국도 겨울엔 마른 것을 삶아 사용하셨지만, 늦가을엔 텃밭에서 막 뽑아온 무로 무청은 잘라내 바로 삶아 송송 썰어 멸치한주먹 넣고 시래깃국으로 끓여 내셨고, 무는 채 썰어 무생채김치를 상에 올리셨다. 그렇게 시래깃국을 끓여 내시면 그게 얼마나 맛있었던지 난 늘 두어 국자는 더 떠먹었던 기억이 생생해, 항암치료 후 병원을 나서면서 엄마에게 전화해 먹고 싶은 음식들을 간간히 주문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한상 가득해두시고, 아파 시들어가는 딸을 애처롭게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시기적으로 호박이 여물어가던 때라 호박죽은 사 먹어야 했다. 다행히 즐겨 다니던 죽집에선 사계절 호박죽을 팔았다. 입맛 없고 시래깃국이 물릴 때쯤, 호랑이콩도 빠지고 맷돌호박도 아닌 단호박으로 끓여낸 죽을 한 그릇씩 사다 먹었다. 엄마 손맛은 아니었지만 난 그걸로 기력을 회복해 다음 항암을 준비할 수 있었다.


엄마가 끓여주셨던 호박죽의 추억 때문일까? 이곳에 와서 호박만 보이면 무조건 한두 개씩 사 들어오는 버릇이 생겼다. 딸은 엄마손맛을 닮는다지만 난 요리엔 소질이 없다. 호박죽을 끓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요리채널을 봤는지, 엄마 손맛 내보겠다고 이곳에서 호랑이콩 비슷한 걸 찾다 가장 비슷한 키드니콩 (Kidney Beans)과 런던에서 사 온 한국산 찹쌀가루를 넣고, 유튜브 채널에서 따온 레시피 그대로 끓여봤다.

엄마 손 맛이 날리 만무하다.


지금쯤 내 고향 오일장터엔 이런 늙은 호박들이 많이 나와있겠다.

쌀쌀해진 요즘, 늙은 호박과 호랑이콩을 넣어 끓인 따뜻한 엄마손맛 호박죽이 호박죽을 두그릇이나 먹고난 지금도 몹시 그립다.

KakaoTalk_Photo_2023-12-13-19-13-23.jpeg 소중한 우리의 호박과 호랑이콩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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