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세비야, 미로 속 햇살과 오렌지 나무

by 봄이

♠︎ 안달루시아 여행 5일째(세비야 1일)

우리는 론다에서의 마지막 아침 산책을 마치고 서둘러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겨 론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고속버스들 사이로 반가운 ‘한글’ 이름을 단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인 관광객을 실어온 모양이었다. 버스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니 반가움이 먼저 밀려왔다. 한글만 봐도, 까만 머리만 봐도마음이 따뜻해지는, 낯선 땅에서 만난 익숙한 그리움이였다.


버스에서 내려 터미널을 빠져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우리의 목적지와 같은 한국인 부부가 환하게 인사를 건넸다. 비가 많이 내렸음에도 그들은 론다 구석구석을 다녀왔다며 작은 마을길을 걸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듣자 우리가 가지 못한 곳에 대한 호기심에 짧은 질문이 오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세비야행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몸을 싣고 두 시간 남짓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스페인 특유의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늦가을 햇살 아래, 진한 초록 올리브밭과 부드러운 연초록빛 오렌지밭이 바람에 흔들리고, 가끔은 벌거벗은 듯 드넓은 황무지가 나타나기도 했다.

‘저 넓은 땅에는 무엇을 심고 어떻게 일구는 걸까?’ 호기심이 자연스레 일었다.

올리브와 오렌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은 강하지도, 눈부시지도 않은 채 들판을 차분하게 밝히고 있었다.

세비야에 도착할 즈음, 하늘에 은은하게 걸린 무지개가 우리앞에 펼쳐진 여행의 찬란함을 미리 보여주는 듯했다.


터미널에 도착해 함께 이동한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딸아이가 예약해 둔 스페인식 아파트를 향해 택시에 올랐다. 택시는 좁은 골목을 곡예하듯 빠져나갔다. 론다나 말라가 골목이 좁다고 생각했지만, 세비야의 골목은 더 오솔길에 가까웠다. 차 한 대가 겨우 비집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오래전부터 골목마다 진입 방향과 통행 흐름을 세심하게 나눈 일방통행 체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덕분에 복잡해 보이는 골목에서도 차량들은 서로 마주치지 않고 물 흐르듯 흘러갔다. 사람이 차를 피하기 위해 벽에 몸을 붙여야 할 정도로 길이 좁았지만, 골목들은 하나의 커다란 순환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모모는 이런 길을 능숙하게 누비는 기사들을 보며, 택시비가 비싼 것도 이해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세비야 특유의 골목 풍경이 펼쳐졌다.

두 손을 펼치면 양쪽 벽이 닿을 듯 가까운 건물들이 이어지고, 머리 위로는 철제 발코니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벽면은 햇살을 머금은 알베로(albero) 색과 흰빛이 자연스레 이어지며, 세비야 골목만의 부드러운 황금빛 공기를 품고 있었다. 짙은 나무문과 고풍스러운 창살이 이어져, 오래된 골목 미로 속으로 자연스레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택시는 좁은 골목을 누비며 어느 광장 옆 골목 어귀에 내려주고, “여기 근처일 겁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유유히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택시에서 내려, 우리는 어깨를 맞댄 빽빽한 집들 사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한 골목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남편의 직진 본능이 발동한 듯, 그는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자신만 믿으라며 앞장서 나가더니 금세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택시에서 내린 지점을 벗어나는 걸 망설였지만, 되돌아온 그는 왜 안 따라오냐며 성을 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나도 화가 났지만, 참을忍을 깊이 새기며 “일단 집주인한테 전화해 봐"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 직진할 태세였다. 결국 내가 버럭 하자, 그는 마지못해 집주인에게 전화했고, 위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로 뒤에서 대문이 열리며 집주인이 손을 흔들며 모습을 드러냈다.

"Hola, señor H!"

“바로 뒤였구나...?!"

그렇게 숙소의 거대한 나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오자 근처 중국식품점이 보였다.

그곳에서 한국 라면 몇 봉지를 사 숙소에 내려놓은 뒤, 다시 골목길로 나왔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유적지, 세비야 대성당부터 먼저 가보기로 했다. 모모는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며 앞장섰고, 나는 뒤에서 골목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느라 분주했다.


집 앞 광장엔 오렌지 나무가 긴 그림자를 드리고 서 있었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덩굴식물이 길 위를 가득 메우고, 그곳을 나서면, 네모난 종탑을 이고 있는 교회와 그 앞에 줄지어 있는 여섯 개의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책을 읽는 소녀 조형물이 있는 작은 광장이 있다


혹시 길을 잃더라도 돌아올 기준점이 될 나만의 좌표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걸었다. 골목마다 스며든 햇살과 덩굴의 그림자, 작은 광장 위로 드리운 오렌지 나무의 향기까지,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10분 거리’라던 길은 결국 30분 넘게 구불구불 이어졌지만, 모모는 여전히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앞서갔다. 덕분에 나는 골목 풍경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머릿속에 새길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모모의 길 찾기 신뢰도가 얼마나 절묘하게 흔들리는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좁은 골목을 한참 돌다, 문득 골목 너머로 세비야 대성당의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모모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길을 재확인했지만, 탑을 발견하자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탑이 있는 방향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늦은 오후, 세비야 대성당 앞 광장은 파란 하늘 아래 여전히 밝고 활기찼다.

성당의 장엄한 첨탑은 기울어가는 햇빛을 받아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광장 위로 따뜻한 햇살이 부드럽게 번졌다. 사람들은 마지막 햇살을 몸에 담듯 성당을 바라보거나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천천히 광장을 지나며 잔잔한 바퀴 소리를 남겼고, 한쪽 벤치에서는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듯 조용히 앉아 있는 이들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광장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서, 대성당 맞은편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오후의 여유가 가득한 작은 카페들이 줄지어 있었다. 테라스에는 사람들이 나지막한 웃음과 이야기 소리를 섞으며 차나 와인을 즐기고, 햇살은 테이블 위 잔에 반짝이며 따뜻한 빛을 드리웠다. 지나가는 바람에 커피 향과 타파스 냄새가 섞여 골목 전체가 느긋하고 낭만적인 오후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고, 아침을 간단히 먹고 론다에서 출발한 지 오래라 배가 고팠던 우리는 그 향기에 더 끌릴 수밖에 없었다.


풍경 감상은 내일로 미루고, 골목 안쪽 작은 선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햇살이 남은 골목 한편 야외테이블에 앉아 타파스와 와인을 즐기며 세비야에서 첫 끼를 해결했다. 올리브 오일과 허브 향이 배어 있는 새우 한 점, 와인 한 모금이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고, 골목에서 들려오는 낮은 웃음소리와 기타 소리를 배경음처럼 곁들였다. 세비야의 첫날을 느긋하게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세비야는 로마 시대부터 번영한 오래된 도시로, 그 역사는 2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히스파리스(Hispalis)’라 불렀고, 군사적 요충지이자 상업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이후 이슬람 왕조가 지배하던 시기, 특히 알모하드 왕조 시대에는 도시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광장과 모스크,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골목들, 당시의 도시 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 왕국이 재정복 한 뒤, 세비야는 스페인 제국의 중추 도시로 발돋움했다. 특히 15~16세기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세비야는 유럽과 아메리카를 잇는 무역의 중심지로 부를 쌓았다. 황금을 실은 선박이 도착하던 항구와 상인들의 창고, 은밀한 금융 거래까지, 당시 세비야는 글자 그대로 ‘황금의 도시’였다.


세비야 대성당은 바로 이 역사의 중심에 자리한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있었으나, 15세기 초부터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성당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높게 치솟은 첨탑과 정교한 조각이 장엄함을 더하고, 한쪽에는 이슬람 시대의 종탑이었던 ‘히랄다(Giralda)’가 남아 기독교적 장식과 어우러진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히랄다는 말을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완만한 경사로가 설계되어 있었다. 그 덕분에 오늘날에도 경사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면 세비야의 붉은 기와지붕과 오렌지 나무가 늘어선 광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을 만날 수 있다.


대항해시대의 상인과 선원들, 금과 향신료, 이슬람과 기독교가 뒤섞인 문화, 그리고 역사 속 숨은 이야기까지, 세비야 대성당과 주변 골목 하나하나가 그 모든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듯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오래된 지도 속에서 탐험가가 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