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봄은 조용히 도둑처럼 온다.

꽃을 사는 순간, 봄은 시작됐다.

by 봄이

월초에는 눈이 내리더니, 그 후 연일 비가 내린다.
날씨는 조금씸 풀린 듯하다. 이 시기쯤되면 기온이 평균 6–7도 안팎을 오간다.

영국의 봄은 언제나 이렇게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하루는 잔뜩 흐리다가도, 다음 날은 햇빛이 잠깐 얼굴을 내밀고, 그러다 다시 금세 비가 내린다.


비가 그치면 나는 어김없이 뒷가든으로 나간다.
며칠 전 봐두었던 새싹이 얼마나 올라왔는지 궁금해, 축축하게 젖은 낙엽을 하나씩 들춰본다.
여기저기에서 연둣빛 새싹이 고개를 내밀고, 한국에서 가져다 심은 햇쑥과 미나리는 벌써 여린 잎을 올리고 있다.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데도, 식물들은 계절을 먼저 알아차린 듯하다.


오늘은 오랜만에 해가 나서 읍내 꽃시장을 다녀왔다.

비가 내린 뒤, 영국의 꽃시장은 누군가를 맞을 준비를 끝낸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듯 보였다.

매대 안쪽에는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만, 꽃 앞에 서서 망설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은 조금 성급해 보이는 봄꽃들만이, 이 조용한 시장에서 먼저 계절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조용한 시장에서만큼은 나도 잠시 차분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꽃을 보는 순간, 나는 어김없이 이성을 잃고 앞뒤 가릴 것 없이 화분을 트레이에 담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의 약간 짜증 섞인 표정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아이도 들었다가, 저 아이는 내려놓았다가를 반복하던 끝에 남편이 결국 한마디 한다.


“그만해라~~~.”


서로 좋아하는 것이 다를 때 생기는 우리의 사소한 갈등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꽃들은 그런 갈등마저 잠시 잊게 만든다.
집에 들일 꽃들이 조용히 피어날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도 그만큼 가라앉는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집에는 이른 봄꽃 화분 여섯 개가 들어왔다.

현관 앞에는 첫인사를 건네는 노란 꽃이 놓였고, 주방 창가에는 은은한 향의 보라색 히아신스가 자리를 잡았다.


거실 창가와 신발장 위에도 화사한 꽃들이 놓이자, 집 안이 한층 밝아졌다.


영국의 집은 창이 작고 햇빛이 부족한 편이라서인지, 꽃이 있는 집은 유난히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비가 잦은 계절이 길다 보니 길가의 돌담에도, 집 담벼락에도 이끼가 금세 올라온다.
창문턱이나 현관 문지방 앞까지도 어느새 초록빛이 스며든다.

그 칙칙함이 익숙해질 즈음, 꽃을 들이고 물을 주며 가꾸다 보니 집 안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
비와 습기가 남긴 어두운 색감 위에, 꽃들이 조용히 빛을 얹는 느낌이다.


저녁 나절부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꽃이 있으면 비가 내려도 마음이 무겁지 않다.
오히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마저 더 아름답게 보인다.
아직 바람은 차갑지만, 꽃들 덕분에 마음은 이미 따뜻한 계절을 맞이한 듯하다.


뉴스를 보니 한국에는 다시 한파가 찾아왔다고 한다.
멀리서 전해오는 추위 소식에 마음이 잠시 머문다. 같은 계절을 살고 있으면서도, 누군가는 아직 매서운 바람 한가운데에 서 있을 것이다.

그래도 봄은 늘 그랬듯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온다.
이 집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들처럼, 계절은 어느 날 갑자기 바뀌기보다 조용히 자리를 넓혀 간다.

차가운 바람 뒤에 오는 계절을 알기에, 오늘의 꽃들은 더 오래, 더 조용히 봄을 기다린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실 이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같은 봄을 향해 시간을 건너고 있을 것이다.
부디 이 기다림이 혼자가 아닌, 서로를 향해 건네는 작은 온기가 되기를...
아직은 차가운 바람 속에 있을지라도, 봄은 분명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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