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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이 Jan 20. 2024

오늘 나는 '약사'

매월 하루, 난 약을 조제한다.

나이 들어가며 주변에서 자주 듣는 얘기가 있다.

"나 병원 가, 온몸이 종합병원이야."

한국을 떠나 영국으로 이사 온 후, 난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워낙 크게 아팠던 지라 자잘한 병치레는 아무것도 아니라 치부하며 살고 있다. 나 보다 더 큰 복병이 내 곁을 지키고 있기에 난 절대 아프면 안 된다. 내 옆지기 '모모'가 문제다. 그는 정말 인간 종합병원이다.

모모는 자신이 '무적의 용사, 천하장사'라며, 증조할아버지가 옛날옛적에  OO도, OO군의 씨름대회에서 소 한 마리를 상으로 탄 천하장사여서, 본인도 그 피를 받아 천하장사라고 하지만 다 뻥이다. 아마도 자신의 아픔을 그렇게 희화해 포장하는듯해 그럴 때마다 마음이 좀 짠하다.

모모덕에 나는 매월 한 번씩 약국과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조제하는 약사가  된다. [워낙 많은 병을 달고 있기에 하루에 먹는 약이 20알이 넘는다.]  

영국 약처방은 한국과 조금 다르다. 한국에 '국민건강보험공단' 있다면 영국은 NHS(National Health Sevrvice) 있고. 마을마다 GP(General Practice, 마을 보건소)가 있다.

동네 병원은 거의 없다.

큰 병은 GP가 아닌 종합병원에서 관리하고, 병원에서 약도 직접 처방해 준다.

'모모'가 가지고 있는 큰 병중 하나는 '신장(kidney) 문제다. 신장 관련 약은 정기적으로 다니는 종합병원에서 받고, 그 외 다른 약들은 GP에서 처방한다. 보통 GP에서 처방전이 나오면 처방전을 들고 거래약국으로 가 약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모모는 죽는 날까지 똑같은 약을 먹어야 하기에 반복처방전(Reppeat Prescription)을 받아 약국에 제출하면, 그 약국에서 GP에 매월 약 처방을 신청한다. GP에서 내린 처방전이 온라인으로 약국에 도착하면 약국에서는 처방된 약을 준비해 두고, 환자에게  몇 월, 며칠에 약을 받으러 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한 시스템이지만, 한국처럼 약을 삼시새끼용으로 분리 포장해주지 않으니, 나이 먹은 노인들이나, 약을 모르는 이에겐 번거롭고, 다소 위험하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에서 사 온 조제도구를 구비해 두고, 매월 한 번씩 날 잡아 한 달 치 약을 조제한다.



오늘이 그날이다.

벌써 몇 번을 하고 있지만, 할 때마다 한두 번씩 소동과 다툼이 일어난다.

비슷하게 생긴 약이 많아 자주 헛갈려 최대한 잘 분리해 놓고, 집중해서 약을 조제해야 한다.

각각의 약이 담긴 그릇을 나열해 두고, 약을 한알씩 주워 약삽에 올린 후, 다섯 장의 약봉지에 부어 담는다. 그러다 가끔 한두 알이 약봉지를 벗어나 또르르 굴러 숨어버리면 그게 어떤 약인지 확인해야 하기에 비슷한 약들을 그릇에서 꺼내 사진을 찍어 확인 후 봉지에 빠진 약을 채워 넣는다.

또 그릇에 담긴 약을 한알씩 줍다가 그만 순서를 까먹기도 한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나이 드니 몸도, 눈도, 마음도 다 시들어 버렸음을 약사 흉내 내는 날 가장 많이 실감한다.

어디서든 돋보기안경이나 휴대폰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니 말이다.

슈퍼에 장 보러 가면 돋보기안경보다 휴대폰이 필수다.

한국에서 돋보기안경 몇 개를 맞춰왔지만, 식료품에 표기된 작은 글씨를 그걸로는 전혀 읽을 수가 없다.

오늘도 비슷한 약들을 몇 번이나 사진 찍어 확대해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약을 봉지에 담아 씰링을 마치면, 든든하면서도 여러 가지 근심 걱정이 올라온다.

우리가 좀 더 나이 먹어 지금보다 더 눈이 나빠지면, 그때 우린 저 약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이곳에서 자주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각종 의료시스템은 세계 최고라는 거다.

영국에 살고 있지만 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내는 각종 안내 메시지는 계속 들어온다. 암검사나 기타 의료 캠페인 등...,

 내가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는 시점부터 나의 의료보험금은 청구 대상에서 제외되고, 다시 입국할 경우, 입국심사대에서 내 여권이 스캔되는 순간 입국데이터가 자동으로 공단으로 들어가는지, 그 순간부터 다시 의료보험이 청구되는 걸 보고는 살짝 놀라기도 했다.

관심 없이 모른 채 살 땐 느끼지 못했던 게, 먼 곳에서 조금 관심을 가지니 다 보인다.

그래서 다들 그런 말을 하나 보다. '있을 때 잘하라는...' 있을 때 건성건성 거리며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는데, 떨어져 나와보니 그 소중함과 고마움을 새삼 느끼고 있다.


보건복지의 대명사인 영국의 NHS가 요즘 자주 뉴스에 등장한다. 심각한 의료인력부족과, 병실부족등으로 의료서비스의 붕괴를 우려한다. 그게 현실화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지난달 GP에서 편지가 한통 왔다. GP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상시 열어 운영하는데, 그 시간 조절에 관한 내용이었다. 의료인력(간호사)이 부족해 몇 날, 몇 날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진료를 할 수 없으니 참고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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