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 남편의 퇴근 시간이 5시였는데, 손이 느리다 보니 오후 3시쯤에 재료준비를 시작해서 꼬박 2시간을 주방에 서 있어야 겨우 남편과 둘이 먹을 저녁 식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재능도 없는 주제에 레시피를 찾아보는 노력 같은 건 시도하지도 않는 게으름뱅이라, 들어가는 비용(재료)과 시간 대비 아웃풋(음식맛)은 형편 없다. 대충 끓이고 지지고 볶고 간을 맞춘다. 어쩌다 적당한 맛이 얻어 걸릴 때도 있고, 가끔은 정체 모를 끔찍한 음식이 탄생하기도 한다.
남편은 내가 해주는 요리를 불만 없이 먹는다. 입맛이 무난해서라기보다,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꾸역꾸역 주방에 서 있는 노고를 이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우리 부부는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를 집 밖에서 찾는다. 주말이면 새로운 카페나 식당에 가서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주문해보고, 검색해서 맛있거나 특색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에 일부러 찾아가보기도 한다. 그래서 식생활에서 외식과 배달 음식 비중이 높은 편이다.
요리하기가 너무 귀찮고 싫을 때 외식을 제안하거나 배달앱을 켜면 되니까 큰 문제가 없었다. 특히 동남아 살이를 하면서는 음식값이 한국보다 저렴한 편이라 더 부담 없고 좋았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파빌리온 몰 바로 앞의 호텔에 살았는데, 파빌리온의 안의 대부분의 식당과 카페를 가봤거나, 배달시켜 먹어봤다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건 부부만 살 때의 느긋하고 여유로운 생활일 뿐, 미얀마 양곤에서 10개월이 된 아기를 키우는 엄마가 된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다.
수 개월 전부터 아기가 6개월이 되면 이유식을 시작할 계획은 세웠지만 두려웠었다.
대충 끼니를 떼우기 위한 요리도 자주 망해먹는 똥손, 채소 다듬는 것에 수 시간을 써야 하는 서툴고 느린 손길을 가진 나.
매일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주방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했다.
맘카페의 이유식 게시판을 보면서 한숨만 쉬었다. 다양한 이유식 업체에 대한 후기들이 넘쳐났다. 이유식을 직접 만들어 먹이는 엄마들이 장착한 다양하고 효율적인 이유식 도구부터 시작해 식재료들은 유기농 쌀과 한우, 무농약 채소들이 기본이었다.
미얀마에서는 한국처럼 시판 이유식이 활성활되있기는 커녕, 재료를 공수하는 것조차 곤란한 일 투성이었다.
이유식을 시작하기 한 달 전,
엄마와 큰언니가 손녀딸과 조카를 위해 엄청난 짐을 한국에서 공수해왔다. 찜기와 이유식 보관용기, 핸드블렌더부터 유기농 쌀가루와 잡곡 가루, 오트밀, 채수팩 등을 가방과 상자 가득 채워 양곤을 방문했다.
그 도움과 격려에 용기를 조금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유식을 시작했다.
쌀과 잡곡가루는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채소와 고기는 현지에서 조달해야 했다.
한우는 커녕 호주산 냉동 소고기라도 구하려고 택시로 왕복 1시간 거리의 매크로(코스트코 같은 창고형 마트)까지 다니고 있다. 미얀마 소고기는 저렴하긴 하지만 너무 질기고 가끔 냄새가 역했다. (한국과 도축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고기가 깨끗하지 않아서 어른들 음식이든 이유식이든 고기를 쓸 때는 씻어서 사용한다.)
요즘은 매크로에도 호주산 기름기 없는 부위의 고기를 찾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호르몬제를 쓰지 않았다고 써있는 미얀마 냉동 소고기를 사고 있다.
날이 더워 그런지 이곳의 채소는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그나마 신선한 물건을 골라도 사오고 나면 금방 시들시들해져버린다.
게다가 필터를 달았음에도 수돗물이 깨끗하지 않아서 채소를 비롯한 이유식의 모든 재료는 생수로 씻어내고 있다.
몇 시간이나 재료를 다듬고 씻고 찌고 갈고 나면 녹초가 됐는데, 그 다음부터는 더 어마어마한 노동이 나를 기다린다.
쌓인 설거지감..
요리나 살림에 대한 요령이 부족하다보니 간단한 음식을 만든다 해도 설거지감이 많이 쌓인다.
게다가 찜기, 믹서, 냄비 등 설거지감이 다 큼직큼직한데에 비해 싱크대는 너무 조그맣고 낮다. 설거지하는 손길은 또 왜 그리 느린지. 느린 주제에 세제에 대한 강박까지 있어서 그릇을 물에 헹구고, 헹구고 또 헹군다.
뜨겁고 습한 동남아의 날씨 속에 에어컨이 없는 주방에서 재료 다듬기부터 시작해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면 울고 싶을 정도로 지치곤 했다.
아기가 이유식을 잘 먹는 건 너무 감사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기의 왕성한 식욕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재료 공수부터 설거지까지, 내 생활은 이유식으로 시작해 이유식으로 끝났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파트타임 헬퍼(가사도우미) 딴딴을 고용한 것이다!
사실 세제 강박증 때문에 수개 월째 일하고 있는 N에게도 설거지를 잘 시키지 않았었는데, 이대로는 내가 힘들어 못 버티겠다 싶은 생각에 마음을 고쳐 먹었다.
설거지를 딴딴에게 넘긴 뒤부터, 나는 비로소 매일 패잔병 같았던 이유식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재
내 하루의 시작은 식재료를 구입하러 가는 날과 이유식을 만드는 날로 나뉜다.
이유식을 만드는 날,
N에게 아기를 맡기고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곧장 전날 사둔 신선한 채소를 냉장고에서 꺼내 다듬고 씻고 잘라서 찜기에 올려 찐다. 다 쪄진 채소를 식히고 있을 때쯤 딴딴이 출근해서 남편과 나의 아침 식사로 쓰인 그릇들과, 채소를 다듬은 도마와 찜기 등을 한 차례 설거지한다.
나는 채소가 식으면 초퍼에 옮겨 아기가 먹기 편한 입자로 자른다. 그걸 지퍼백에 평평하게 펴넣고 냉동실에 보관한다.
초퍼는 유리로 되어 있어 무겁기도 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두 개나 있어서 늘 딴딴에게 설거지할 때 조심하라고 일러야 한다.
소고기를 만들어야 하는 날에는 고기를 삶은 커다란 냄비가, 아기 밥을 한 날에는 밥을 소분해 덜고난 뒤 남겨진 밥솥이 싱크대 안에 자리잡는다.
비좁은 싱크대 앞에서 그 큰 도구와 그릇들을 차분하게 설거지하는 딴딴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딴딴이 뒷정리 및 설거지를 해주기 시작한 후 이유식 만들기가 더 이상 스트레스로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가끔 너무 많은 설거지감이 쌓여 있으면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낄 뿐.
요즘 아기는 이유식에서 유아식으로 한 걸음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죽처럼 냄비에 끓이던 베이스 밥 대신 밥통에물을 많이 넣고 지은 진밥을 먹기 시작했고, 반찬 입자도 조금씩 키우고 있다. 아직 아랫니 두 개밖에 나지 않았지만 오물오물 잇몸으로 씹어 삼키는 아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간질간질해진다.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단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잘 먹고 튼튼하게 크자, 우리 아기.
그리고 네가 먹는 이유식의 절반의 노고는 딴딴에게 있으니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꼭 맛있게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를 그녀에게 해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