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키슈가 뭔지 모른 채 그저 내 발음을 따라 직원에게 물었는데,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자 당혹스런 표정이 되었다.
“달걀이랑 베이컨이 들어간 파이 같은 거야. 기억 안 나? 우리 지난 번에 그 식당에 갔을 때 먹었었어. 키슈 로렌이랑 베지 키슈.”
그제야 N은 음식을 기억해내고 다시 직원과 통화에 열중했다.
“가능하대요. 그리고 맴, 케이크에 이름 새길 수 있대요.”
“그래? 해달라고 해줘.”
N은 우리가 살고 있는 콘도 이름을 알려주는 걸 마지막으로 긴 통화를 끝냈다.
“식당 직원이 택시비 알아보고 바이버로 영수증 사진을 보내준대요.”
잠시 후 미얀마의 채팅앱인 바이버로 영수증과 케이크에 새길 이름을 묻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는 남편의 이름을 써서 답했다.
일이 잘 마무리 된 걸 확인한 뒤, N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아기를 얼렀다.
그런데 생일 당일, 약속했던 시간이 다되었는데도 택시로 배달된다는 케이크가 감감무소식이었다.
가끔 미얀마에서 일처리가 깨끗하지 못한 경험을 한 터라 걱정이 됐다. 만약 케이크를 받지 못한다면 파트타임 헬퍼(가사도우미)인 딴딴이 퇴근하기 전에 근처 몰에 가서 대체 케이크라도 사오게 해야 했다.
N이 전화를 해보겠다며 내 핸드폰을 가져갔다. 식당에 전화해 통화한 뒤 그녀는 ‘30분 후에 도착한대요’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30분 뒤 케이크는 무사히 도착했고 그 케이크로 남편 생일 파티를 할 수 있었다.
N이 없었다면, 아마 동네에 있는 몰에 가서 적당한 케이크를 대충 골랐을 테지만 그녀 덕분에 우리는 맛있게 먹었던 치즈 케이크를 다시 맛볼 수 있었다.
요리 똥손 와이프가 사랑의 힘으로 차린 소박한 생일상. 그리고 문제의(?) 케이크. 보기엔 볼품없지만 치즈맛이 300프로 진하게 느껴지는 현지 물가 대비 꽤 비싼 케이크다.
N은 우리 집 헬퍼(가사도우미) 겸 내니(육아도우미)로 고용되었고, 파트타임 헬퍼인 딴딴이 온 뒤로는 내니 일이 주업무가 되었다.
하지만 내니 일 못지 않게 그녀가 필요한 또 다른 업무가 있었으니, 바로 ‘통역’이다.
나는 단순한 여행 외에도 해외에서 장기체류한 경험은 여러 번 있었다.
필리핀에서 3개월, 캐나다에서 6개월와 3개월, 말레이시아에서 1년, 프랑스에서 6개월을 지냈었다.
장기간 생활하면서도 통역이 필요하단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대부분 영어로, 하다못해 바디랭귀지로라도 의사전달이 가능했었다.
종종 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상점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한다거나 하는 수준의 불편함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 불편함은 대부분 번역기 앱으로 해결 가능했다.
물론 양곤에서도 오프라인에서는 간단한 영어, 번역기앱, 바디랭귀지로 어떻게든 소통은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전화’!
아기가 있다보니 더운 날씨에 외출하기가 어려워 마트 배달이나 음식 배달을 자주 시키는 편인데 배달원이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얀마에도 한국처럼 모바일에서 바로 결제하는 시스템(Kpay같은)이 있긴 하지만 나는 아직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서 주로 물건이나 음식값을 현금으로 지불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가 살았던 콘도들 모두 보안 상 배달원이 집까지 올라올 수 없는 시스템이라 물건을 가지러 항상 로비로 내려가야 했다.
배달원들은 매번 전화를 걸어왔는데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다보니 그들이 전화를 건 이유가 콘도를 못 찾아서인지, 몇 분 후에 도착한다고 알리기 위해서인지, 혹은 콘도에 도착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배달원이 걸어 온 전화벨이 울리면 곧장 N에게 건네주게 되었다. 그녀는 배달원과 통화하며 집 위치를 상세히 알려주거나, 물건을 가지러 로비로 내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는 N에게 더 많은 소통을 맡겼다.
마트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을 수 없을 때 N을 통해 직원에게 묻고, 마트에서 물건을 배달시켰는데 품절이 됐다며 배달을 취소할 건지 물어오는 전화도 그녀가 대신 받는다.
가고 싶은 카페나 식당을 구글에 검색한 뒤 아기 의자가 있는지 묻는 전화도 N의 몫이고, 식당에서 원하는 메뉴를 찾을 때나 까다로운 주문을 할 때도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다.
열흘에 한 번꼴로 생수를 주문하는 일도, 집에 뭔가가 고장났을 때 매니지먼트에 알리는 것도, 고치러 온 직원과 문제점에 대해 의논하는 일도 N이 하고 있다.
아기 중이염 체크를 위해 남편 없이 N과 함께 병원에 가서는 그녀가 현지인 의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심지어 그녀는 나와 우리집 헬퍼인 딴딴과의 의사소통도 통역해주고 있다. 물론 딴딴과 나도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제스처와 간단한 영어, 눈치로 한결 소통이 쉬워지긴 했지만 정확하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할 땐 N을 통한다.
지난 5월 한 달 간 양곤에서 지내다 가신 친정엄마는 생활의 많은 부분을 N을 통해 해결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간단한 미얀마어를 직접 익히면 이곳 생활이 더 편해지지 않겠냐고 하셨다.
엄마의 말대로 내가 현지어를 익힌다면 직접 빠르게, 효율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N의 역할은 단순한 통역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예를 들어,
“세면대 물이 또 잘 안빠져.”
라고 한 마디 던지면 N은 로비에 전화해 상황을 설명하고 관리실 엔지니어들이 방문할 시간을 의논한다. 집에 사람들이 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방 한쪽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N이 대신 세면대를 살펴보러 온 엔지니어들에서 상태를 전해듣고 청소를 시키거나 딴딴에게 필요한 약품이나 부품을 사오게 하는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나는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나와서 엔지니어들의 워킹 오더 페이퍼에 사인을 하거나 돈을 지불하면 상황 종료.
이처럼 그녀는 현지인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은 기본이며 소통 후에 따른 소소한 일처리들을 대신 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