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늘 숨겨왔고 영원히 감추고 싶은 사실이 하나 있다. 사실 나는 책이 재미없고 따분하고 지겹다. 오래 앉아있으면 자세가 불편해 숱한 통증이 찾아왔고, 혹시 ADHD는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산만해 글의 흐름을 자주 놓치고, 난독증이 있는지 글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해 한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읽었다. ‘책은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며, 책만이 인간을 고취시키고 성장시킨다’와 같은 명언에 깊은 공감을 했기 때문일까. 이것은 그저 작심삼일의 의지를 북돋을 뿐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책을 읽을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한적한 카페에서 책을 펴놓고 우월감에 젖어 책을 읽는 모습, ‘고상한 인간’이라는 하나의 작품이 되어 관객에게 전시되는 모습, 난 당신들과 다르다며 나도 모르게 어깨를 치켜세우던 모습. 난 그 모습에 쾌감을 느껴왔다. 공적·사적 영역 사이에서 공간을 자유롭게 조율한다고? 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본능에 솔직하지 못한 변명일 뿐이다. 난 우월감에 흠뻑 젖어있었다. 단지 그 뿐이다.
우월감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고상함, 고귀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아름답고 이상적인 것, 우리가 바라는 것 혹은 지향하는 것일 수 있다. 왜 우리는 고귀한 인간이 되고자 할까. 우리는 고귀함이라는 단어를 덮고 있는 아름다운 포장지를 뜯어내면 이제 막 포식을 마치고 피 묻은 입가를 핥는 사자를 보는 듯한 섬뜩함과 마주하게 된다.
고귀하다, 고상하다, 우월하다, 뛰어나다와 같은 말은 항상 그 비교대상, 다시 말해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전교 1등을 하는 학생은 경쟁 속에서 겸손을 배우는 게 아니라 패배자에 대한 동정과 조롱, 멸시라는 잔인한 쾌감을 배우고, 종교적 순결을 지킨 여성의 고귀한 손가락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게 향하며, 일찍 성경험을 한 남자아이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마치 왕처럼 군림한다. 이보다 무가치한 것은 없지만 이보다 강력한 쾌감도 없었다. 고귀함이라는 것, 고상함이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고귀함이라는 높은 산에 올라 산 밑의 경치를 바라보면 열등한 것, 하등한 것,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나쁜 것이 보인다. 열등함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고귀함이라는 산에 오른 자의 권리이고 권력이자 지배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등함은 곧 평범함, 보통이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잔인한 쾌감을 위해 우리는 열심히 성장했고, 강박적으로 사회적 관습 혹은 윤리를 쫓았다. 남들이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지위, 권위 혹은 명예는 그저 간질이는 정도이다. 우린 오래전부터 고귀한 자만이 비천한 이에게 조롱과 멸시의 동정을 보일 수 있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ADHD, 난독증인 나를 의자에 앉혀놓았던 것은 그 숱한 명언들이 아니라 책상 앞에 앉아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더러운 쾌감 덕분이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크나큰 쾌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 그 공간에 있는 동안 내가 가진 고상한 취미에 자부심을 갖고 우월감에 젖어 나를 전시하는 것에 자기위로를 해왔다. 처벌이라는 선한 폭력을 즐기는 만큼이나 잔인한 쾌감을 즐겨왔던 것이다.
달라질 건 없겠지만, 조금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내 모든 행위 전반에 깔려 있는 더럽고 추한 본능, 쾌감에. 풍습과 관습, 공동체가 생겨나는 시점부터 우리는 선한 인간 그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단지 산 정상에 올라 그 밑을 내려다보고 싶었을 뿐이다. 선한 자, 진정으로 정직한 자는 그저 때 이른 죽음을 초래할 뿐이다. 무엇을 걱정할까. 우리는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