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음식이 좋아서 쓰는 음식 이야기
지난 명절 연휴 중에 고창에 다녀왔다. 고창하면 떠오르는 특산품은 당연 복분자겠지만 복분자와 쌍벽을 이루며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선운사 부근에서 판매되는 풍천장어다. 풍천장어의 풍천(風川)이란 특정 지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역을 의미하며 이 기수역에서 잡힌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한다. 선운사를 나와 만나는 하천을 따라 쭉 달리다보면 그 길을 따라서만 십수개의 풍천장어 전문점이 있고 그대로 바다까지 내달리면 만을 사이에 두고 변산반도와 마주보게 된다.
사실 나는 이전까지는 장어를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다. 사실 장어를 비롯해서 굽는 향기만으로도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든다는 전어구이도, 씹는 맛이 일품인 고소한 세꼬시 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생선을 먹을 때 그 안에 들어있는 가시를 모두 발라내야 한다는 모종의 강박 같은 것이 있었고 잔가시가 많고 뼈째로 먹는 생선은 늘 도전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처음 먹어보았던 장어는 잔가시가 없는 뱀장어(민물장어)가 아니라 가시가 많은 붕장어(바다장어)였고 입 안에 씹히는 잔가시를 모두 발라내느라 꽤나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뼈째로 먹는 생선이 생각보다 많으며 그 식감을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다양한 어종에 새로 도전했다. 이번에 아버지의 강력 추천으로 찾아가서 먹게 되었던 풍천장어도 사실 내게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뱀장어는 잔가시도 많지 않았고 육질이 단단하고 고소했으며 촉촉하고 느끼하지 않았다. 생선을 씹는 식감이라기보다는 육즙이 많은 닭 정육을 씹는 느낌이 났다. 이동 시간과 웨이팅 시간까지 합쳐 네 시간 반이 전혀 아깝지 않았으며, 이렇게 구운 남의 살은 언제나 옳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
우리나라는 모든 인사를 밥으로 대신한다. 지금까지 잘 지냈냐는 인사는 '밥은 먹고 다니냐'이고, 한 번 만나자는 약속은 '밥 한 번 먹자'이다. 어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고 잘 살아가고 있다면 '밥 값을 한다'라고 하고 함께 일을 하는 사이는 '한솥밥을 먹는다'라고 한다. 이는 우리 민족이 살아오는 동안에 식문화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으며 특히 식사를 대접하고 대접받는 문화가 같은 솥에서 지는 밥을 함께 먹는 사이라면 같은 편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저변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은 밥의 민족이었고, 우리는 밥을 함께 먹으며 닥쳐왔던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왔다.
고기 이야기에서 뜬끔없이 밥 이야기를 먼저 서두로 내민 이유는 나에게 '밥 한 끼 하자'는 관용 표현이 '고기 먹자'라는 나의 언어와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음식을 좋아하는 만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없이 행복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화로를 가운데에 두고 고기가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힘들었던 이야기, 좋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이 내가 지금 돈을 버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일만큼.
옛날에 만화 채널에서 방영됐던 애니메이션 중에 <요리왕 비룡>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에서 비룡은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국영반점 '국하루'의 조리장이 되기 위하여 후견인의 권유로 특급요리사 시험을 보게 된다. 이 특급요리사 시험에서 비룡은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주제로 면요리를 만들었는데 일신의 무력이 뛰어났던 한나라 초의 무장 한신처럼 면 하나만으로 정면승부를 한다.
나는 구워 먹는 고기들도 국사무쌍의 한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는 양념 없이 소금 간만으로도 먹기도 한다. 물론 김치찜이나 찌개, 전골처럼 부재료의 도움을 받는 다른 조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기는 구웠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돼지고기로는 겉면이 바싹하게 익혀진 것도 좋고(물론 이베리코는 속은 살짝 촉촉하게 익힌 것이 부드럽고 맛있지만) 소고기는 살짝만 익혀서 부드럽게 먹는 것도 좋다. 명이나물을 감싸 먹어도 맛있고 파절이를 넣은 상추쌈도 맛있다. 요즘은 소금을 살짝 찍어서 고추냉이를 올려먹는 것을 좋아한다. 고기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이렇게 고기를 바라만봐도 행복한 나의 첫 고기 이야기는 초등학생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6년 간 학교에서 방과후 시간에 사물놀이를 배웠다. 아직 학생음악 경연대회가 없어지지 않았을 시절이었고 초등학교를 다닐 때 우리 학교는 시내에서 꽤나 실력 있는 학교였기 때문에 대회가 가까워져오면 아침 시간, 점심 시간, 오후에도 모여서 연습을 했다. 사물놀이부 학부모회도 따로 있어서 부모님들의 간식비로 연습이 끝나면 이런저런 간식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하이라이트는 대회가 끝난 날 저녁 회식으로 먹는 삼겹살이었다. 먹성 좋은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면서 고기에 냉면에 된장찌개까지 순식간에 흡입했던 추억. 그것이 내 머리 속 처음 모두와 함께 먹었던 고기에 대한 기억이다.
가족들과 함께 갔던 동네 고깃집들도 많다. 우리 가족 중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있거나 혹은 함께 살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원하시거나 우리 삼남매가 고기를 부르짖는 날에는 집에서 고기를 구워먹거나 동네 무슨무슨 가든, 무슨무슨 고을의 이름이 붙은 고깃집에서 양념돼지갈비를 구워먹곤 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고기를 먹는 일이 늘 즐거운 일이었고 내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우호적인 표현이 함께 고기를 먹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나의 각 시기를 대표했던 고기들이 있다. 앞서 말했듯 초등학교~중학교 시절에는 주로 돼지고기였다. 삼겹살과 달콤짭짤한 양념돼지갈비가 최고라고 생각했고 후식냉면에 싸먹는 남은 고기 몇 점이면 행복했다. 물론 그 시기에 우리 집안은 보릿고개를 지나고 있었지만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그 행복한 기억 덕분에 어렸을 때의 기억이 먹구름으로만 남아있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동서교육격차가 큰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물론 정말 좋고 친하게 교류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서부에서 온 일부 아이들은 동부에서 와서 선행학습도 되어있지 않은 내가 점점 자신들의 성적을 추월하는 모습이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일부 무리에서 배척당했고 그래도 겉으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드라마의 영향인지 이때는 한창 치맥이 열풍이었다. 물론 학생 신분으로서 맥주를 마실 순 없었지만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열한시쯤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함께 종종 시켜먹었던 양념숯불치킨이나 후라이드치킨은 늘 맛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때 최고점을 넘겼던 몸무게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몸무게로 한 번도 다시 돌아가지 못했지만 늘 어려운 길을 돌아돌아 공부해야했던 그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아주 좋은 활력소였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대학교 동기들과 정말 많이 고기를 먹었다. 먹는 고기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요리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다. 대학생 때 가장 많이 다녔던 곳은 천변을 따라 있던 고기뷔페였다. 지금은 열기가 시들해졌지만 그때는 두꺼운 삼겹살을 무한리필해주는 고깃집이 유행이었다. 대학생 신분에 건장한 청년 여럿이 모여 인분 단위로 계산해야하는 고기를 먹으려니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럴 때 고기뷔페는 좋은 선택지가 되어주었다. 또 학교 맞은 편에 공기밥을 무한리필해주는 제육볶음 맛집이 있었다. 봄이면 된장찌개에 냉이도 넣어주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역 후 다시 찾아가보니 문을 닫아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다.
현직에 나오자 부속 부위와 양고기에 눈을 뜨게 되었다. 신규교사 시절에 나는 관내에서 독특하기로 유명한 관리자에게 찍혀 악질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내가 상신한 문서에 유독 반려를 하고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면서 교무실로 찾아가면 역정을 냈다. 내가 교무실에 들어서는 걸음걸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걸음걸이라고 비난했으며 회의시간에는 짓궂은 농담을 일부러 던지기도 하였다. 죽을만큼 괴로웠다. 그 사람의 잘못임이 명백했으나 상황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내선전화와 메신저 알림음이 무서웠으며 다음 날이 걱정되어서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 사람은 그 모든 행위를 '가르친다'고 표현했다. 발령 후 불과 두 달 안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해엔 악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학년 및 같은 학년군의 선생님들과 다른 관리자분의 도움으로 그 사람으로부터의 맹목적인 괴롭힘을 피하고 숨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동료장학을 마치고 있었던 회식도, 자주 만들어졌던 여러 자리들도 그분들의 격려와 응원 덕에 그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 사실 일 년 내내 같은 패턴의 반복이었다. 나는 괴롭힘을 당하고 힘들어하고 친구들한테는 늘 하소연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늘 그 사람을 욕하며 내 편을 지루한 내색 없이 들어주었다. 우리는 주로 양꼬치 무한리필집에서 자주 만났는데 내가 지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이 집의 진가는 양꼬치집임에도 불구하고 양갈비도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양갈비가 너무 맛있다는 것을 이유로 자주 놀러와 준 친구들. 물론 그 집 양갈비가 정말 맛있었던건 아주 팩트지만 어쩌면 그 친구들이 그 해에 그렇게 자주 놀러왔던 것은 그 양갈비가 맛있었기 때문만은 아님을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해의 내 버팀목은 동료선생님들과 친구들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함께했던 친구들은 요즘도 가장 친하게 왕래하고 있다. 식성도 비슷해서 대학생 때는 부담이 되어서 먹지 못했던 막창이나 곱창같은 요리들을 자주 먹고 가끔씩 소고기도 구워먹는다. 나도 지금은 학급 운영도 많이 익숙해졌고 좀 여유가 생겨서인지 음식을 먹으며 학교 이야기를 할 때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 고기를 먹자고 제안할 수 있고 그들도 가벼운 마음으로 한 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러 자리에 나온다.
그때 있었던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때처럼 모든 화살을 나에게로 돌리지는 않는다. 산다는 일이 늘 내 마음대로 흘러온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들을 겪었고 그리고 지나올 수 있도록 응원해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우리 고기 먹을까요'하고 제안할 수 있다. 앞으로도 물론 수많은 일이 있겠지만 그 사람들과 고기를 구워먹으며 울고 웃고 하소연도 하면서 역경을 잘 극복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
special thanks to
그때 양갈비를 같이 먹어주고 이제는 같이 먹은 음식 사진도 제공해주시는 맛집 페어님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