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변화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인공지능(AI)일 것입니다. 어떤 모임에 가도 이 이슈가 빠지지 않죠. 지난번 한 모임에서는 AI 를 화제로 얘기를 나누다가 한 분이 ‘팬터브리드’로 그림 그리기 시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석양에 요트를 타고 가는 남녀를 그려줘. 이런 프롬프트로 시작된 그림은 세 번의 수정 끝에 피요르드 해안을 배경으로 마린룩의 남녀가 슈퍼요트를 타고 가는 멋진 그림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걸 보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각자 원하는 그림을 완성하기에 열중했고, 스마트폰을 돌려가며 그림들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그날 꽤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만 다른 어떤 화제보다 인공지능 발달이 가져올 세계에 대해 나눴던 것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몇 개의 명령어만으로 원하는 그림을 얻을 수 있고,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고 또 원하는 글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에 말입니다.
AI의 발달은 기대와 염려, 이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은 분명한데 그 모습을 구체화하긴 아직 어려운거죠.
흔히 ‘세기말’ 이라 불리는 시대에도 기대와 염려가 뒤섞여 있었을 것 같습니다. 19세기 말 유럽도 여러가지로 격동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 변화 중에 제가 관심을 가진 것은 ‘유리’였습니다.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에서 건축에 유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세기말 파리에서부터라는 걸 알았습니다. 아케이드란 큰 도로 사이를 유리 천장으로 연결한 곳을 말합니다. 건축에 철과 유리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공간이지요. 유리는 철, 시멘트와 함께 3대 건축재료로 불립니다.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매력적인 재료입니다. 인류가 유리를 사용한 것은 매우 오래전이라고 합니다. 귀족들의 장식품으로도 사용했고 특히 16세기 유리로 만든 거울은 값비싼 귀중품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14세는 거울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궁전의 한 부분을 온통 거울로 장식했는데 그것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입니다. 하지만 유리가 건축자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 무렵부터입니다. 철과 결합되어 온실이나 시장 건물의 지붕, 아케이드 등 다양한 유리구조물이 만들어졌습니다. 요즘 멋진 랜드마크 건축물에 유리를 사용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유리만큼 건물 외관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재료가 없고 건물 안에서도 밖의 풍경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리에 주목한 것은 건축재료로서 유리가 사용되는 시점이 인간이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시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옛 무덤에서 청동거울이 출토되지만 그건 오늘날의 거울처럼 들여다보는 용도가 아니라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 혹은 주술 의식에 사용된 물건이라는 게 역사가들의 일반적 견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자기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을까요? 대중들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유리가 건축자재로 사용된 때부터라고 합니다. 유리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19세기말 파리.
19세기말 파리에 사고 있던 엠마는 새로 만들어진 아케이드를 지나며 쇼윈도의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유리 가까이 다가가 머리모양도 매만지고 얼굴 근육을 움직여 여러 표정을 연습해 봅니다. 자신의 실루엣을 보면서 옷 매무새도 가다듬습니다. 살을 좀 빼야겠는걸, 엠마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거울 앞에 서야 비로소 자신이 보입니다. 객관화가 가능합니다.
ChatGPT 가 오픈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최근 버전 ChatGPT 4 소개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나옵니다. 텍스트 작성하기, 에세이 생성하기, 언어 번역하기, 소셜 포스트 만들기, 여행 계획 팁 작성하기, 노래 가사 만들기, 물체 식별하기. 몇 개의 요구조건을 넣고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글도 써 줍니다. 망설임없이 순식간에 요구한 분량의 원고를 채워줍니다. 엄청난 능력이고 우리가 대단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글쓰기라니. 더구나 글쓰기 열풍이라니. 뭔가 좀 아이러니한 것 같지만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AI가 어디까지 진화할지 지금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유토피아를 예견하는 학자도 있고 디스토피아의 도래를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 끝은 알 수 없지만 AI가 진화하면 진화할수록 인간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에 더 몰두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게 인간임을 증명하는 행위일테니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