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 특임대, 오산 죽미령 전투

미국이 겪은 첫 패배, 그리고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다

7부에서 UN의 극적인 참전 결정으로 한반도에 희망의 빛이 비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UN군이라는 거대한 군대가 한반도에 도착하기까지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시간을 벌기 위해, 일본에서 평화로운 주둔군 생활을 하던 한 미군 부대가 급히 전선으로 투입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스미스 특임대(Task Force Smith). 그들은 미군의 자존심이자 한반도를 구할 선발대였지만,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습니다.


"가서 북한군을 막아라" - 준비되지 않은 선발대


UN의 참전 결의가 떨어지자, 도쿄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극동군 총사령관은 가장 가까운 부대인 일본 주둔 미 제24사단의 일부를 급파하기로 결정합니다.


사단 전체를 이동시키기엔 시간이 부족했기에, 제21보병연대 제1대대를 중심으로 포병, 통신 등을 급조하여 약 540명 규모의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이 부대의 지휘관, 찰스 B.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 '스미스 특임대'라 명명되었습니다.

2025-08-06_16-06-45.jpg 전장으로 이동하는 스미스 특임대, 그들은 북한군들이 자신들을 보면 도망갈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명료했습니다.


"부산에 상륙하여 북상, 북한군의 남진을 최대한 지연시켜라."

오산, 죽미령 작전도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처참할 정도로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훈련 부족: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점령군 임무만 수행하던 터라, 대부분의 장병은 실전 경험이 전무했습니다.


장비 부족: 병사들은 개인화기인 M1 소총만 보유했을 뿐, 부대 전체에 기관총은 단 6정, 박격포는 4문에 불과했습니다.


치명적인 대전차 무기 부재: 그들이 보유한 주력 대전차 무기는 2.36인치 바주카와 75mm 무반동총 몇 문이 전부였습니다. 이는 이미 국군에 의해 T-34 전차에 전혀 효과가 없음이 증명된 구식 무기였습니다. 심지어 대전차용 고폭탄(HEAT)은 1인당 고작 6발만 지급되었습니다.


2025-08-06_16-11-40.jpg 당시 스미스부대의 군기 수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진. 그래도 우리에게는 고마운 분들이니까....


"우리가 한국으로 떠날 때, 우리는 이것이 경찰 활동(Police Action)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성조기를 한 번 흔들면 북한군들이 겁을 먹고 도망갈 것이라고 믿었다. 누구도 이것이 진짜 전쟁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스미스 특임대 참전 병사의 훗날 회고


1950년 7월 1일, 부산에 도착한 스미스 특임대는 열차와 트럭으로 밤새 달려 7월 5일 새벽, 오산 북방의 죽미령(竹美嶺)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이 미 육군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패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1950년 7월 5일, 죽미령의 비극


오산 죽미령은 수원과 평택을 잇는 경부국도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낮은 언덕이었습니다. 스미스 중령은 이곳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로 했습니다.


오전 7시 30분: 빗속을 뚫고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북한군 제4사단 소속 T-34 전차 8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미군 포병대가 105mm 곡사포를 발사했지만, 일반 포탄은 전차의 장갑에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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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16분: 선두 전차가 700야드 앞까지 접근하자, 스미스 중령은 "발사하라(Fire!)"고 외쳤습니다. 2.36인치 바주카 팀이 용감하게 뛰어나가 로켓탄을 발사했지만, 로켓은 T-34의 두꺼운 장갑에 맞고 불꽃만 튀긴 채 튕겨 나갔습니다.


"마치 강철 벽에 테니스공을 던지는 것 같았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차들은 멈추지 않고 우리를 향해 포를 쏘며 다가왔다. 그때 우리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당시 전투를 기록한 미군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뒤이어 25대의 전차가 추가로 나타났습니다. 미군 포병대가 마지막 희망이었던 대전차 고폭탄(HEAT)을 발사하여 간신히 전차 2대를 파괴하고 2대에 손상을 입혔지만, 탄약은 금세 바닥났습니다. 북한군 전차들은 유유히 스미스 특임대의 진지를 통과하여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2025-08-06_16-23-57.jpg 북한의 T-34 전차를 향해 바주카포를 발사하는 스미스 특임대 장병


오전 11시: 전차가 지나간 뒤, 이번에는 약 5,000명으로 추정되는 북한군 보병의 거대한 파도가 언덕을 향해 밀려왔습니다. 스미스 특임대는 수적으로 10대 1의 절대적인 열세였습니다. 북한군은 미군의 측면을 포위하며 포위망을 좁혀왔고, 통신이 두절되면서 지휘 체계는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 스미스 중령은 마침내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질서 있는 후퇴가 아닌, 공황 상태에 빠진 패주였습니다. 병사들은 중장비를 모두 내버려 둔 채 흩어져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쑤시개로 탱크를 막으려 했다" - 참혹한 결과와 교훈


단 몇 시간의 전투 끝에 스미스 특임대는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부대원 540명 중 181명이 전사하거나 실종, 포로가 되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패배는 미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세계 최강이라 자부했던 미군이, 그들이 '3류급 군대'라 얕보았던 북한군에게 첫 전투에서 이토록 처참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제24사단장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이 전투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쑤시개로 불도저를 막으려 한 것과 같았다. (It was like trying to stop a bulldozer with a toothpick.)"


스미스 특임대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에게 두 가지 뼈아픈 진실을 깨닫게 한 '혹독한 각성제'였습니다.


첫째, 한국 전쟁은 성조기만 흔들면 끝나는 '경찰 활동'이 아니라, 막대한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진짜 전쟁'이라는 것.


둘째, 북한군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강력한 무기와 실전 경험으로 무장한 '강력한 적'이라는 것.


결론적으로 오산 죽미령 전투는 미군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스미스 특임대의 비극적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패배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던 워싱턴과 도쿄의 지휘부를 각성시켰고, 이후 미군 사단 전체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투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달려와 가장 먼저 쓰러졌지만, 그들의 피는 자유 세계가 전쟁의 참혹한 실체를 깨닫고 총력전을 준비하게 만든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025-08-06_16-17-38.jpg 스미스 특임대 장병들, Thank you for your service.
2025-08-06_16-19-23.jpg 오산시에 소재한 스미스 특임대원 초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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