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내 앞에 노트, 볼펜이 놓여있다. 손은 얼어붙어 있고, 머리는 암막 커튼이 쳐진 상태로 침침하다. 누군가 온몸에 저주를 내린 듯 마비되었다. 온갖 애를 써보지만, 볼펜은 미동도 없고 노트는 여백의 미를 아는 듯 여전히 새하얗다.
엉덩이가 아프고 머리가 화끈거리듯 숨 쉬는 느낌은 시간이 꽤 흘렀음을 눈치챘다. 몸은 비비 꼬며 얼굴이 책상에 붙기 일보 직전이며 다리는 떨리고 발가락은 꼼지락 거림이 심해졌다. 내 한계를 느꼈다.
이때는 밖으로 나가 걸어야 한다. 산책은 유용하다. 걷다 보면 걸음 속에서 나에게 무엇을 준다. 정확한 정답은 아니어도 실마리, 즉 어느 정도 해답을 건네준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다르다. 잡념만 떠오른다. 평상시 산책은 생각이 물밀듯이 들어오는데 의도적으로 생각을 짜내려고 하니 의식이 흐름을 막았나 보다. 내 의식이 너무 또렷해서일까. 아니면 정신의 문을 닫고 있어서일까. 집중력이 생생해서였을까.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나를 맞춰 놓고 걸어야겠다. 깊은 궁리가 생각의 틀을 가둬 끄집어내는 것을 멈췄다.
산책은 인간에게 몸 건강을 선사하고 정신도 깨어나게 해 준다. 루틴 중 하나인 만 보 걷기 목표는 일찍 달성하게 도와줬지만, 글쓰기 주제 구상은 해결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산책은 산책대로, 인간은 인간대로 부담을 갖는다. 경직된 사고는 자유롭지 못해 더욱 힘들게 한다.
가을 산책 햇볕은 눈이 부시고 얼굴이 따갑다. 그것이 싫어 나무가 햇살을 막아주는 시원한 그늘을 찾아 걷는다. 그늘을 따라 걷다 보니 선명하게 맑은 바닥과 졸졸 소리의 청량한 냇물을 바라본다. 단지 듣고 바라볼 뿐이다. 다른 감정은 느낄 수 없고 꼭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의 아림을 피하고자 걸음을 재촉했다.
그 길로 계속 걷다 보니 마주 오는 사람들 얼굴이 보인다. 나만 역주행이다. 그럼, 어떤가. 어디 가서 법을 지키지 않고 당당히 역주행해 보겠는가. 하나의 작은 일탈이요, 자유다. 산책은 정해진 규칙이 없다. 내가 가고 싶은 길, 내 다리로 가면 된다. 산책에 본성이 있다면 자기 결정 즉 독립이겠다.
돌아오는 길은 남과 같은 길, 같은 방향으로 온다. 왜냐하면 햇살을 피하기 위함이지만 자연에 순종하기 위함이다. 나는 이기적이다. 추우면 햇살을 찾고 더우면 회피한다.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고 고마운 존재다. 인간들이 이기심을 부려도 다 받아주니까.
돌아오는 걸음을 빠르게 독촉한다. 마치 빌린 돈을 갚으려는 듯 말이다. 이유는 머릿속에 생각을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메모하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느긋하게 가련다. 아무리 서둘러야 좋을 게 없다. 왜? 속력을 올려 가봐야 내 마음만 급할 뿐 다 까먹고 만다. 더 천천히 음미하면서 가야겠다. 생각이 깊게 풍부해지게 그리고 느리게 느끼며 말이다.
#산책 #구리장자호수공원 #사유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