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를 떼는 중이다.
나는 죽은 상태였다. 살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았으니. 무엇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이 없었다. 진짜 무지하고 무식했던 나였다. 보이는 빈 껍데기를 꿈찍히 중요하게 여겼는지 그것이 드러날까 봐 더욱더 숨어 살았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디서든 움직이지 않아야 했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삶, 학습, 관계 등 생활의 필수적인 것을 배제하다 보니 발전은커녕 변화가 없었다. 그 결과는 성장도 실패도 없는 무위(無爲)의 생활이었다. 이 안락한 생활은 나를 잠식시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그냥저냥 살아왔다.
‘못난 나를 드러내야 잘 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못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겠는가. 약점, 못난 점, 잘못하는 점은 숨기기에 바쁜 세상에 말이다. 드러나면 타인의 지적과 공격에 두려워 더욱 자신을 덧칠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즉 외부 시선을 의식해 자신을 덧칠하는 데 집중했다. 못난 나를 드러내야 잘 난 내가 된다. 부족한 부분, 잘못하는 부분, 실수하는 부분을 헤아릴 수 있어야 잘난 나로 태어날 수 있다. 우리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길들어 있는데, 데이빗 소로우 작가의 월든에서 나에게 일침을 가하고, 깨주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 갈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다른 변을 가진 원들을 그릴 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각해 보면 모든 변화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기적은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참되게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상상 속에서 사실을 오성(悟性) 속에 사실로 바꾸어 놓을 때 모든 사람은 드디어 그 기초 위에서 자기의 인생을 세울 것으로 나는 내다본다.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데이빗 소로오와 공자의 말처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을 구별하면 인생을 내다보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변화는 의지, 열정, 결심, 결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안 하는 것과 같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변화의 동기는 마음에서 다리로 가야 시작되는 첫걸음이다.
나의 인생에 덧칠은 그만하고, 멈추련다. 마치 상어처럼 말이다. 부레가 없는 상어는 멈추는 순간 숨을 쉬지 못해 죽는다고 한다. 인간도 그렇지 않을까? 욕구가 없으면 살아있는 시체라고 하니 나 또한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한다. 작은 일을 하면 마치 큰 것을 이룬 것처럼 나에게 많은 편안함과 만족감을 줬다. 그것은 나에게 안락을 주면서 주저앉게 해 성장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
내가 하는 “나를 찢어 성장시키는 100일의 기적” 프로그램이 나의 고통을 주며 발전을 끌어낸다. 즉 변화를 가져다준다. 현재 시점에서 나를 바라보면 제자리다. 그래서 매일 끊임 없이 나를 의심하고 점검해야 한다. 매일의 루틴을 잘하고 있는지 대충대충, 설렁설렁 때우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주말과 휴일은 나에게 그렇게 반갑지 않다. 지금의 나에게 휴식은 악덕과도 같다. 나는 안락하다는 생각에 젖어 들면 잠들어 버린다. 다리를 움직여주지 않으면 정신이 혼미하며 멈춰버리는 것이다. 지금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야 하는 시간이다. 일정한 시간이 쌓여야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곧 채워져야 하고, 소진돼야 열매를 얻는다.
성장하고 싶다면 용기가 필요할까? 감히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다. 용기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일단 하느냐? 아니면 않느냐? 만 있을 뿐이다. 더 잘하고, 한계를 뛰어넘고자 할 때 비로소 용기가 필요하다. 나에게 아직은 용기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닌 일상에서 우선순위의 루틴을 묵묵히 진행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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