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진짜?

생각하는 나, 생각 없는 나, 인식하는 나

by 김정락



골프 스윙을 연습하면서 주말골퍼 대다수가 이런 말을 한다. “머리로 생각하면 알겠는데 실제로 공을 치면 잘 안 된다.”라고 말이다. 이 말에 따르면 지식(이론)으로는 이해했음을 뜻한다. 어찌 보면 데카르트가 말한 “확실한 지식”을 뜻하는데, 그럼 그 지식에 대해 의심은 해 보았는지 질문하고 싶다. 여기저기서 정보의 바다에 널려 있는 지식을 귀동냥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상대가 경험도, 깊이도, 어설픈 학습이라도 상관없다. 내 생각과 맞으면 그만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얕은 지식과 맞는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맹신한다. 그렇다고 잘 짜인 이론을 듣는다고 해도 자신이 소화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쉽다고 생각하면 무시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꺼린다. 결국 생각에 갇혀 있는 꼴이 아닌가 싶다. 지식을 활용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편승해 생각만 한다.


그래서 또 한 가지!! 그들은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인데, 생각에 지배당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생각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계속 외쳐댄다. 골프 문제도 있겠지만, 생각의 속성을 모르니 더 헤매고 있다. 생각은 과거를 떠올리게 되고 부정적으로 흐르고 우울함에 빠뜨린다. 생각에 지배당하면 감정까지 지배당한다. 생각이 “든다. 난다.”라고 표현하는데 주체가 ‘나’가 아니다. 그래서 골프와 인생에서 생각을 많이 하지 말라는 충고한다. 생각이 많으면 감정이 복잡해져 행동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불필요한 쓰레기 생각과 감정은 버리고 선별해야 한다.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의식적 각성이 필요하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지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단다. 그의 철학은 확실한 기초에 서 있어야 하며 그 기초는 어떠한 의심과 질문에도 견뎌내야 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는 내가 없다면 의심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철학과 굴뚝 청소부, 이진경). 그래서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탄생하였다.


중세철학은 신에 대한 인식을 목표로 믿음을 공고히 했다면, 근대철학 데카르트의 출발점은 신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 의심할 수 없는 “나”, 확실한 주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으로부터 독립된 주체, 중세시대에서 벗어난 사고의 틀을 마련했다. 자기 주체 ‘나’에 대해 안다는 것은 자기 이해가 돼야 하는 말이다.


‘나’라는 코기토가 없이 내 사상을 만들지 못하고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 확실한 지식이 없으니 의심이 없고, 의심이 없으니 내 생각이 없고, 생각이 없으니 확실한 주체, ‘나’가 없는 것이다. 주체인 내가 없다면 내 생각이 없고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이다. 소위 거죽만 뒤집어쓰고 있는 인간일 뿐이다.


자기 주체, 이해는 자신을 파헤쳐 자신을 인지하는 행위다. 자신은 스스로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 자기 이해가 부족하다. 자신이 부족하고 무지한 이유는 자기 이해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기계 내부를 알기 위해 완성된 조립을 하나하나 해체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해체해 봐야 그 속을 볼 수 있고 무엇이 있는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필요하고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을 해체하는 과정은 즉 괴로운 과정이고 이해와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확실한 주체, 나를 이해할 때 안목과 통찰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나부터 나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과 사물 그리고 현상의 복잡한 구조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나심 탈레브는 경험이 없는 가르침, 박식함이 없는 학위, 깊이가 없는 복잡함 등 이것을 피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이것을 나를 겨냥한 듯하다. 경험이 없고, 학위만 있고, 어설픈 복잡함만 있다. ‘나’라는 주체는 사라졌다. 나를 찾고 단단하게 만들어 깊이와 경험이 있으며 단순하면서도 질서가 잡힌 복잡함으로 깊은 내면을 넓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지독히 고통스러운 자기 이해가 선행되어야 깊은 안목과 통찰이 생긴다.



내 얕은 지식으로 의문이 든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주체는 ‘나’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고 말하면 독립된 주체라고 했다. 근데 생각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무의식이라고 한다. 그럼, 생각하는 주체는 내가 아닌 무의식이다. 즉 주체가 내가 아니다. 생각의 속성은 나에게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 우리는 문뜩 떠오르는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는 이어지는데 그 생각 내가 한 것인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온 생각이다. 그럼, 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의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맞는 게 아닐까? 좀 더 들여다보면 데카르트 ‘생각’ 속에는 ‘의심’과 ‘질문’으로 확실한 지식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본다. 생각에서 멈추지 말고 의식을 추구해야 한다.


다시 골프 이야기로 돌아오면 “생각 많은 골퍼”는 생각이 많아 스윙을 방해한다. 생각은 과거 부정을 떠올리고 주체가 내가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에게 계속 침입한다. 골퍼는 한 가지만 생각하고 스윙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이 계속 물고 들어오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으로 몸은 굳어진다. 그래서 의식적 스윙을 시도해야 한다. 의식의 문을 만들어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하고 머리를 비우고 스윙한다. 이것이 무의식 스윙이며, 골퍼는 “아무 생각 없이 스윙할 때 잘 맞는다.”라는 경험을 접한다. 생각을 줄이고 의식을 강화하고 지식을 갖추면 용기가 나온다.


“나는 무의식으로 스윙한다, 고로 나는 의식하는 존재다.”
-김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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