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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수 May 29. 2022

우연의 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읽고

퇴근하고 바로 집에 가기에는 아쉬운 날이었다.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 드물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만나 아무 이야기라도 해야 집에 편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가 주인인 을지로의 작은 바로 향했다. 


그곳은 언제 가더라도 지인 한두 명은 만날 수 있는 작은 아지트였다. 혼자 가더라도 친구 한 명쯤은 사귈 수 있는 다정한 곳이기도 했다. 그날도 그랬다. 맥주잔을 반쯤 비웠을 때 미국에서 놀러 온 한국인 유학생, 곧 말레이시아로 떠난다는 내 또래, 인테리어를 한다는 젊은 남자들과 자기소개하고 함께 잔을 부딪쳤다. 붉게 타오른 얼굴처럼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오래된 내 지인들이 왔을 때 마음은 더 부풀어 올랐다. 오은영 선생님의 상담은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하다, 초보운전인데 운전 실력이 늘어나 좋더라 라며 우린 떠들었다. 


그러다 옛이야기가 잠시 나왔다. 알게 된 지 5년 정도 된 지인들과의 이야기였다. 그때 첫인상이 어땠느니, 새벽 1시에 삼겹살을 먹었었지 라며 추억에 잠길 때쯤이었다. 한 지인이 나보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한마디는 대단히 기뻤고 나는 문득 안심하게 되었다. 여기 오길 참 잘했다고.



“사랑을 받는 일은, 사랑을 주는 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곁에서 사라지면 멈춰진다. 사랑을 주는 일은, 우리 마음 안에 타인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외로워지지 않는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의 이 문장들을 읽고 작년의 이날을 떠올렸다. 


갈등이 동시다발로 터졌다. 풀 방법이 거의 없었고 지나가기만 바란 시기였다. 그 시간을 온전히 홀로 견뎌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다 나는 고립돼 있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된 건 우연이었다. 이날 이곳에 갔으니까. 주변에 따뜻한 친구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새삼스럽게 다짐한 그날 밤. 그 밤은 영원히 외로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든 날이었고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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