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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수 Jun 24. 2022

장마와 운동화

싫어하는 일을 싫어한다는 표현 없이 쓰기

이렇게 비가 온 6월 23일 저녁 ⓒPixabay


밥을 먹고 계산하고 카드를 빼고 뒤돌아섰을 때 비로소 알았다. 분명 거대한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초대형 그물망이 마치 이 도시를 집어삼킨 것만 같았다. 그럴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 1시간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오진 않았는데. 진짜 오긴 오는구나. 기상청 예보가 맞긴 맞는구나. 장마의 시작이었다.


오른손에는 우산을 쥐고 있었지만 도저히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방 안에 있는 노트북과 소설책 한 권보다 더 걱정한 것. 그건 바로 내가 신은 운동화였다. 저 내리는 비 사이를 신공을 펼쳐 날아간다고 하더라도…다 젖어버리겠지? 낭패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밑으로 시선이 갔다. 저기 커플은 삼선 슬리퍼를 신었다. 오늘을 위해 미리 맞춘 건가? 역시 샌들을 준비한 사람이 있네. (이 글을 쓰며 샌들힐이라는 게 있는 것도 알았다) 아니 구두를 신고 지금 여길 걸어간다고? 도대체 왜? 


이럴 땐 양말 없이 둥근 구멍이 숭숭 뚫린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은 사람이 제일 부럽다. 물을 들이부어도 거침없이 걸을 수 있는 사람들. 옆 CU에 가서 6000원짜리 삼선 슬리퍼를 하나 살까. 그러면 내가 지금 신고 있는 운동화와 양말은 어떻게 하지. 비닐 봉다리에 넣어서 가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그건 민폐일 것 같고…


약속 장소까지는 대략 네 블록. 조금이라도 소강상태가 오길 바랐지만 그럴 기미가 전혀 없었다.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둘러맸다. 나갈 채비를 마쳤다.


어떻게든 운동화가 덜 젖게 걷자. 물웅덩이를 피하라는 특명과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나의 두 눈은 빠르게 전방을 주시하고 동시에 머릿속에는 내비게이션 화면이 떴다. 도로 위에는 보이지 않는, 하지만 나만이 볼 수 있는 붉은 선이 안전한 길을 그어 주었다. 그 선을 따라 요리조리 도로를 침범한 빗물을 밀어내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마지막 고비는 한 블록을 남겨 놓았을 때였다. 한 차선밖에 없는 이 도로는 애초 어떻게 설계했는지 사방에서 물이 흐르고 또 고여 있었다. 거의 재난 상황에 가까웠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나의 운동화는 이렇게 왕창 젖어버리는 것인가. 머릿속에서 센서가 민첩하게 움직였다.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지시받은 대로 도로의 측면을 공략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강력한 빗물이 있었고 결국 운동화에 물이 스며들고 말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이지. 이 정도의 찝찝함이라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따라 벽면이 더욱 물결처럼 휘어 보이는 강남의 한 고층 빌딩 앞에 당도했을 때 그제야 나는 숨을 골랐다. 운동화에 빗물이 좀 들어갔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미션 컴플리트. 장마 첫날. 이젠 당분간 운동화는 신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약속 장소에 들어섰다.(6/23)

 

*글쓰기 모임 <글로 만난 우리>에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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