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의 영화 <오 루시!>
<주의! 이 글은 <오 루시!>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읽을 때 주의해 주세요>
무색이었던 일상이 색감으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다. 히라야나기 아츠코 감독의 일본 영화 <오 루시!>의 세츠코(테라지마 시노부)가 그렇다. 40대로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친구도 없고 직장에서도 혼자다. 출근 시간대의 어둔 색깔의 겉옷을 걸치고 나란히 열차역에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 초반의 배경처럼, 세츠코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랬던 세츠코는 조카의 권유로 다니게 된 영어 학원에서 전환점을 맞는다. 존(조쉬 하트넷)이라는 영어 강사를 만나면서다. 존은 세츠코에게 영어 이름을 지어준다. 바로 루시다. 뭔가 신나는 느낌의 루시가 된 세츠코는 노란색 가발을 쓴다. 존은 미국식 영어공부를 하자며 세츠코와 포옹한다. 세츠코는 수업을 같이 듣는 톰(야쿠쇼 코지)와도 포옹을 하게 되지만 별 느낌이 없다. 세츠코는 알게 된다. 존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됐다는 것을.
그러나 세츠코가 행복을 느꼈던 시간은 환상에 가깝다. 세츠코가 존을 만나기 위해 다시 한 번 학원에 갔을 때 존은 미국으로 떠나고 없다. 애초부터 세츠코가 존을 만났던 영어학원이 환상 같은 곳이다. 술집처럼 음산한 분위기로 전혀 학원같은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이 환상 같은 곳에서 세츠코는 새로 변모한다. 존을 찾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세츠코는 주체적인 인물이 된다. 자신의 조카와 존이 연인사이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존에 대한 감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적극적인 것을 넘어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단둘이 있는 자동차에서 존을 덮쳐 섹스를 주도한다. 존이 연인과 사랑의 징표로 한 문신과 똑같은 것을 한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존의 마음을 얻고 싶어하는 루시의 모습은 이제 막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 병아리 같다. 표현, 감정방식이 낯설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외로워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알아봐 달라는 아우성인 셈이다.
세츠코가 이후 우연히 만난 조카와 다투는 장면에서도 주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루시는 조카에게 자신이 존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는 그 동안 가슴 속에 맺혔던 응어리가 폭발한 것과도 연관 지을 수 있겠다. 예전에 자신의 남자친구를 언니에게 뺏긴 경험이 있는 세츠코이기에 이런 폭로는 자신의 과거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인다.
물론 그 폭로 이후 세츠코는 언니와 조카에게 외면을 받는다. 자신에 대한 집착이 무서웠던 존에게까지 버림을 받는다. 결국 영화는 세츠코가 루시라는 잠깐의 환상을 맛 본 후 사랑을 찾으러 미국까지 건너가지만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외롭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세츠코의 주변 인물들 역시 완성된 사랑을 얻지 못한 점 역시 외로움을 증폭시킨다.
일본으로 돌아온 세츠코는 예전보다 더 비참하다. 회사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그는 회사를 그만둔다. 존도 곁에 없어진 이 상황에서 그가 시도하는 건 자살이다. 그러나 이때 우연히 톰이 세츠코의 집을 찾아온다. 타케시의 도움으로 세츠코는 목숨을 구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다시 한 번 포옹을 통해 이 처절한 외로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선사한다. 영화의 첫 장면의 배경이기도 했던 열차역 플랫폼에서 말이다. 학원에서는 밝아보였던 톰은 자신이 가족을 잃었던 과거를 언급하며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한다. "나와 톰은 정반대 사람이었어요. 우리 포옹해요." 플랫폼으로 진입하는 열차 앞에서 세츠코는 새로운 포옹으로 다시 힘을 얻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