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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수 Jul 04. 2022

비밀의 방으로

마동석은 진실의 방으로. ⓒ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 메가박스중앙(주) 플러스엠


대부분 흐리지만 개중에는 선명한 채 남아있는 것도 있다. 나의 5학년 4반 담임 선생님은 이곳에 부임한 지 오래되지 않은 남자분이셨다. 아마 다른 학교에 있다가 오신 것 같았다. 얼굴에 윤기가 있었고 머릿결에는 생기가 돌았다. 선생님의 두 눈에는 기대가 차올라 있었다. 무엇보다 무섭지 않게 생겨 좋았다.


5학년 4반만 사용할 수 있는 종이 지폐를 만든 건 선생님이셨다. ‘훈민정음’, ‘첨성대’, ‘숭례문’이라는 이름의 역사스러운 세 종류 지폐였다. 성실하게 수업을 듣거나 자리 정돈을 잘하거나 선생님이 모이라고 했을 때 빨리 오면 선생님이 한 장씩 주곤 했다. 때로는 한 번에 첨성대를 받을 수도 있었다. 훈민정음 10장이면 첨성대 1장과 바꿀 수 있었고 첨성대 10장은 숭례문 1장과 같았다. 숭례문을 받아보는 게 우리에겐 일생일대의 염원이 되었다.


선생님은 학교 정문 왼쪽 첫 번째 분식집과 계약을 했다. 첨성대 1장을 내면 500원짜리 컵 떡볶이나 슬러시를 사 먹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시대를 앞서 가상 화폐를 만든 분이었고 열두 살 아이들에겐 우리 반 만의 자랑거리였다. 우리 문화재에 익숙하게 하려는 선생님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이 방 아님.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그런 선생님과 나만의 비밀이 하나 있다. 어느 날 우리 반 여자애가 쓰고 있는 샤프가 눈에 띄었다. 위아래로 흔들기만 하면 자동으로 심이 나오는 그 샤프는, 뚜껑을 눌러야 심이 나오는 내 것보다 훨씬 세련돼 보였다. 그 세련된 샤프가 얼마 후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걸 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 샤프를 주웠다. 필통 안에 잘 넣어두었다가 마치 처음부터 내 샤프였던 것처럼 꺼내 썼다.


그 여자애에게 걸린 건 얼마 안 가서였다. 자기가 잃어버렸다며 돌려달라고 했다. 나는 이게 너의 것인지 알 수 없지 않으냐고 했다. 그 여자애는 몇 번 뭐라고 하다 자포자기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얼마 후 선생님이 밝은 표정으로 수업 끝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다. 그 당시 나는 집에 어른이 잘 계시지 않아 수업이 다 끝나고 한두 시간 학교에 더 있다가 집에 가고는 했다. 빈둥거리던 내가 선생님에게 언제 이야기하냐며 살짝 보챘다. 책상에서 용무를 보던 선생님은 잠깐 기다려달라고 했다. 짧은 시간이 지나 선생님은 이제 괜찮다며 나를 조용히 학교 체육관의 빈방으로 데리고 가셨다.


샤프 이야기였다. 진수가 주웠는데 돌려주지 않아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뒤는 자세히 기억 안 나는데 선생님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게 타일렀던 건 확실하다. 나는 당장에 죄송하다고 이야기하였고 그 와중에도 내가 줍긴 했지만 그 아이의 것인지 알 수 없어서 한 번에 돌려주지 못했다고 변명을 해버렸다.


정말 왜 그랬을까 하다가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그건 선생님의 어떤 방식이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 당시 몇몇 선생님들은 혼내는 것을 공개된 장소에서 하였다. 그러니까 운이 나쁘면 선생님에게 뭐라 뭐라 말을 듣는 내 모습을 누군가가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누가 봤다면 나는 다음 날 학교에 오면서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담임 선생님은 비밀의 방을 찾았다. 열두 살의 내 눈에 그건 커다란 배려였다. 덕분에 나는 선생님 앞에서 부끄러워질 수 있었다.


“어린이가 가르쳐 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며 오랜만에 선생님을 떠올렸다. 선생님이 고심했을 여러 흔적을 따라가 보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선생님께 혼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날 그 여자애에게 샤프를 돌려주었다. 그 여자애의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미안했다. 같은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바로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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