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화 파이란(감독 송해성)을 봤다. 20년 만의 재개봉. 평일 낮 시간이라 관객은 많지 않았지만 그때 그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려는 분위기가 극장 내에는 돌고 있었다.
파이란. 뭔가 푸른빛이 돌 것만 같은 제목의 이 영화는 굉장히 기묘하면서도 절절했다. 참 애틋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기분이 든 건 아니다.
질퍽한 폭력의 세계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차츰 방향을 튼다. 거친 폭풍 같았던 영화는 말 그대로 푸른빛이 돌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주 아프다. 보는 사람을 울릴 정도로. 어딘가 집요할 만큼, 어딘가 무모할 만큼 마음을 녹여내는 마음이, 한 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재(최민식)는 이리저리 치인다. 후배들에게 무시받는 건달이다. 친구이자 조직 보스 용식(손병호) 앞에서는 눈칫밥만 먹는다. 어느 날 용식이 예상치 못한 사건을 일으킨다. 강재는 용식 대신 감옥에 들어가기로 한다. 그런 강재 앞에 갑작스러운 부고가 전해진다. 그것도 아내의 부고(!). 아내의 이름은 파이란(장백지). 강재가 예전에 위장 결혼을 해준 중국 여성이었다. 강재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의 장례식장이 있는 강원도로 떠난다. 가는 길에 강재는 파이란이 오래전 보낸 편지를 읽는다.
인생이 바닥으로 침몰하기 직전인 건달과 그런 그를 향해 일방적인 연정을 품은 여성의 사랑. 다소 뻔한 외피를 두른 이 영화는 사실 찬 얼음을 녹이는 훈풍 같다. 요즘 말로 하면 ‘겉바속촉’이라고나 할까. 파이란의 편지 내용이 강재에게 닿고 변화하는 강재를 보며 내내 긴장했던 관객의 마음도 조금씩 풀어진다.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 씨가 가장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에 강재 씨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
강재에게 도착한 파이란의 편지는 애틋함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진심. 가족은커녕 친구 한 명 없는 낯선 이국땅에서, 파이란을 구해준 건 우연하게도 깡패 강재였다. 고마움을 넘어 사랑을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파이란의 모습에 이 영화는 우아한 곡선을 타기 시작한다.
사실 이 영화가 더 절절한 건 강재와 파이란이 만나는 장면이 딱 두 번 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둘의 대화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한다. 마주 보는 장면은 딱 한 번 나오는데, 이마저도 강재는 파이란을 알아보지 못한다.
살아서 교감하지 못한 이 둘은 결국 한 명이 죽어 마음으로 교감한다. 오히려 영화 속 사랑의 향기는 진해진다.
인생에는 여러 굴곡의 일들이 펼쳐진다. 이 세계에서 사랑하는 이를 살아 만나지 못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이 영화 같은 이야기에 우리는 완전히 강재가 되어 파이란을 그리워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