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서평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세계 3대 미술관답게 수백 개의 작품이 전시되었지만 그 중 눈에 띄는 작품이 있었다. 19세기 러시아의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바실리 페로프(1834~1882)의 작품인 ‘트로이카’였다. 트로이카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17호실의 페로프가 그린 도스옙스키 초상화가 걸린 벽면에 같이 붙어 있었다. 이 작품은 세 명의 어린 아이가 눈보라가 치고 얼어붙은 길을 아주 커다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들의 표정은 굳어 있고 고통스럽게 무거운 수레를 끌고 가고 있음에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세 명의 어린아이 모두 다른 곳을 응시한다. 오직 사상을 모르는 강아지만이 앞을 보며 뛰어간다. 어린아이들이 표정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일까. 어른들의 사상전쟁에 지쳐 웃음을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표정을 드러냈다간 정죄받을까 두려운 것일까. 이는 비단 19세기 이야기가 아니다. 2세기가 지났음에도 표정을 상실한 채 경직된 얼굴로 살아가는 이들은 수없이 많다. 무엇이 두려워서 우린 얼굴을 상실했을까. 우리는 왜 대면하는 법을 잊었을까.
다이허우잉은 19세기의 대표적으로 얼굴을 상실했던 인물이었다.
어릴 적 부친이 당의 불합리한 명령에 반대의견을 제시했다가 우파로 낙인찍혀 절대빈곤을 경험했음에도 그녀가 상하이 화둥 사범대학 중문학부를 재학 당시 당 지도부의 지시에 맹목적으로 복종했으며 스스로 전사가 된 기분에 도취했었다. 그녀 스스로도 신중국 없이는 자기처럼 가난한 시골의 어린이가 대학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녀의 가난이 당의 착취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문화대혁명 당시, 당의 지도부가 정해준 논지를 가지고 ‘대비판’의 논객이 되어 수많은 우파를 비판했다. 그런 그녀가 ‘휴머니즘’을 경험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바로 ‘검은 시인’ 원지에를 만난 사건이다. 당시 그녀가 썼던 ‘대비판’에 역공을 한‘반혁명 대자보 비판’과 남편과 이혼으로 힘들었던 다이호우잉은 원지에와 고난을 공유하며 애정을 키워나갔다. 둘은 결혼을 원했으나 당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유증으로 원지에는 자살을 하고 다이호우잉은 이 경험을 토대로 소설『시인의 죽음』을 출간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인간소외’개념을 발견하며 자신만의 휴머니즘을 갈고 닦았다. 그 요체가 바로 소설『사람아 아, 사람아!』이다.
다이허우잉의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은 거대한 사상전쟁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간 사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소설에서 개인은 경직된 사회와 고착된 사상으로 당의 도구로 전락했다. 당의 절대명령 아래 개성은 무시당하고 사생활은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 이런 배경 가운데 사상과 이상 사이에서 깊은 좌절을 경험했던 두 남녀, 허징후와 쑨위에가 이십여년만에 다시 만나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인간다움’을 찾아간다. 그 외에도 9명의 중요한 등장인물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일인칭 서술을 하며 소설을 이끈다. 이러한 기법은 한 사람, 한 사건, 한 사물을 다각도에서 비춰주어 편향된 시각을 탈피시켜주며 인간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고 총체적이고도 본질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휴머니즘을 돋보이게 해준다.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에는 특별한 동사가 하나 등장한다. 입말도, 글말도 아니다. 이 소설에서만 특별히 쓰이는 동사다. 바로 ‘사회하다’라는 동사다. 이 동사는 쑨위에의 동창 쑤씨우젼이 소생과 대화하다 가난한 쑨위에를 평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그리고는 씨우젼은 이렇게 정의한다. “시치미 떼지 마. 모를 리가 없잖아. 사회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뜻이지.” 쑨위에는 다이허우잉의 자화상 같은 존재이다. 그녀는 다이허우잉처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소꿉친구와 결혼을 했고 대학생때 당위원회의 서기 씨리우의 첩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 지도부의 측근으로 활동했었다. 그녀가 충성심은 소설의 끝자락에서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사회하지 않는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씨우젼의 말을 잘 톺아보면 사회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남을 속이지 않는 자기 원칙이다. 분명 쑨위에는 남을 속이지 않는다. 딸에게 과거를 다 이야기하고 씨리우에게 옳은 말을 날린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속인다. 자신의 이상을 속이고 감정을 속인다. 스스로를 잘못되었다고 치부하며 행동을 교정한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씨리우의 아들, 씨왕과 쑨위에의 딸, 한한이다.
이 둘은 다음세대 인물들이다. 문화대혁명을 겪지 않았고 경직된 사회를 경험하지 않았다. 능글대고 얍삽 빠르다. 씨왕은 아버지 씨리우를 속여 정보를 빼내고 한한은 허징우를 들들 볶아 과거를 들춰낸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다. 이 둘은 멈춰버린 톱니바퀴를 돌리는 윤활유가 어물쩍거리는 허징우와 쑨위에를 대면시킨다. 대면. 맞다. 이 소설은 대면하는 이야기다. 사회와 인간, 세대와 세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신과 자신이 만나는 이야기다. 만남 없이는 이뤄지는 것이 없다. 이루어내려면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길이 다르더라도 반드시 도달하는 곳이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대면해야한다.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은 대면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소설 초반에는 인물의 대화가 사상갈등, 대혁명, 정책, 독백 등 개인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중반에 동창모임을 다루며 점점 인물간의 대면이 잦아졌고, 삶, 애정, 웃음(승화) 등 관계를 다루는 이야기가 즐비해졌다. 다이허우잉은 이런 구성을 통해 독자에게 대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누군가를 만날 때 경직된 사상과 마음이 녹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21세기 우리사회에도 대면은 여전히 잊혀졌다.
과거 중국처럼 사상논쟁이 있지도 않고 ‘우파’라고 낙인찍는 정부도 없다. 그러나 그 자리를 돈이 차고 들어와 사회하지 않는 이들을 색출해서 가난이라는 웅덩이에 던져버린다. 여전히 조금이라도 돈에 저항하면 가차 없이 ‘낙오자’가 되어 존재를 박탈당한다. 그런 우리에게 다이허우잉은 무슨 말을 할까. 돈에 지쳐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며 뭐라고 한탄할까.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사람아 아,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