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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모 Nov 05. 2019

퇴고

   

어제 야근하며 퇴고했던 글이 오늘 백지가 되었다. 대표님께서 어제 기자에게 퇴고문을 보내지 않아 기자가 다른 퇴고원문을 보내왔다. 그 덕에 글이 두 개가 생겼다. 대표님이 나를 방으로 불러 두 원고를 비교해서 윤문하라고 말했다. 책상에 두 글을 놓고 보니 같은 글을 퇴고했음에도 완전 다른 두 글이다. 지적한 비문과 오문들마저도 다르다. 글쟁이들이 어찌 그러냐 하겠지만 이런 일은 여러 사람이 퇴고하다보면 종종 있는 일이다.   

  

한국 문법은 생각보다 자유로워서 출판사마다 규정이 다르고 작가마다 문법이 다르다. 사실 이 차이는 작가의 스타일이나 출판사의 규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글을 퇴고하는 사람의 해석에 달려있다. 글을 읽고 문맥을 이해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구상한 내용이나 장면을 글에 다시 묘사하는 과정이다. 만일 퇴고의 고정적인 함의가 있다면 누구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글을 쓴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같은 글을 퇴고해도 다른 글이 나온다.     


꼭 말과 같다. 사람은 자기 자리에서 사건을 보고 말을 만든다. 사람은 같은 일을 겪어도 자신이 선 자리에 따라 다른 말을 한다. 연말 송년회로 친구들을 만나면 꼭 과거 이야기가 흐른다. 천방지축시절 웃고픈 이야기들 향연들은 듣다보면 서로 고개를 갸우뚱한다. 눈치싸움이다. 한명이 말을 덧붙이기 시작하면 서로 달려들어 자신의 기억을 쏟아낸다. 그러다 괜히 불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이지만 그것이 송년회의 매력 아니겠는가. 모두 다 퇴고한 사실의 토론의 장이다.     


며칠 전 지인이 내 소식을 들었다며 연락이 왔다. 새해 인사를 빙자한 확인전화다. 아는 것과 다르지만 그것 또한 퇴고된 사실이라 생각하고 웃어 넘겼다. 어차피 지나간 이상 사실은 없고 퇴고만 남은 이야기에 다시 퇴고할 이유가 없다. 다른 두 글을 만들 필요가 없다. 눈과 손만 고생할 뿐이다. 벌써부터 새해인사를 받으니 기분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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