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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끝 Nov 05. 2019

동심


노(老) 신사숙녀들이 놀이터였던 광장시장 사거리에 단풍잎과 은행잎으로 알록달록한 카페트가 깔려있다. 요즘은 어디든 조금만 특별하면 관광지가 되어 시장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손을 꼭 잡은 커플도 봇짐을 이고 출근하시는 아주머니, 아저씨도, 구제시장에서 옷을 살 생각에 재잘거리는 학생들도 광장시장을 생기 넘치게 한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가족이 있었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양손에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보기에 너무 아름다웠다. 신호등은 바뀌었고 버스들이 정류장에 정차했다. 그때 아이는 말 한마디를 던졌다.     


“할아버지 버스가 방구 꿔요.”     


응? 고개가 돌아간다. 버스가 정차하며 내는 소리가 아이를 꺄르르 웃게 만든다. ‘귀엽네’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넘기려는데 할머니의 말이 들려왔다.     


“그치? 버스가 방귀 뀌지? 반갑다는 거야, 그러니 손 흔들어줘.”    

 

아이가 손을 흔들자 괜히 나도 덩달아 버스를 향해 손을 들고 싶어졌다. 내가 흔들었으면 주책이었겠지. 우리는 아이의 마음을 동심이라고 부른다. 동심이란 크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중한 생명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아이의 눈에는 버스가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귀여운 생명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버스의 증기배출이 방귀로 보이지. 키스해링은 아이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잊고 살아가는 것들을 어린아이들은 알고 있다.” 맞다. 우리는 가끔 세상 모든 것을 소중한 생명으로 바라보는 눈을 닫고 살아간다.      


나는 어릴 적 인형을 좋아했다. ‘남자에게 무슨 인형을 좋아해’ 하겠지만. 내 방 책상 위에는 인형들이 가득했다. 그 친구들은 하나하나 이름이 있었고 하루에 한번은 꼭 그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었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어느 순간 친구들은 내 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자신을 챙기는 것조차 벅차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무슨 이유를 동심을 잃었을까.     


사람들은 세상이 고정되었다고 여긴다. ‘세상(World)’을 ‘사실’(Fact)처럼 불변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세상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꼴이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원래라는 말은 원래 없다는 말이다. 역할의 고정도 마찬가지다. 태초에 정해진 역할은 없었다. 신은 이 세상을 창조하고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며 보기 좋았다고 했지, 역할을 정해주시지는 않았다. 인간 스스로가 구조에 갇혀서 자신의 제한하는 꼴이다.    

 

이는 선생님들의 선생이라고 불리는 파커 파머도 동의한다. 다윈과 사회적 다윈주의 이래, 생물학적 실재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는 부족한 자원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경쟁을 벌이는 개체들,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자연”(Tennyson)의 이미지였다. 이런 이미지는 자연의 틀에 갇혀 생명의 실재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결과가 폭력과 착취의 구조이다. 중세 전쟁사를 전공한 유발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은 인지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 과학혁명을 겪으면서 더욱 진보하고 세상은 발전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불행해졌다고 말한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에 달려있기에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격려한다.     



선생들의 선생 파커 파머


세상을 고정된 사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제한된 공간에서 먹고 먹히는 사슬구조가 형성되고 계급관계가 성립된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양육강식의 구조로 지금까지 왔음에도 세상은 더욱 나아지기는커녕 살벌한 얼음판이 되고 있다. 이제는 토대를 바꿀 때가 되었다. 방식이 아니라 토대를 바꿔야한다. ‘세상이 고정불변’이라는 옛 토대 말이다. 세상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에 따라 변한다. 그 시작점을 우리는 다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파커파머는 그 토대를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에서 발원하는 지식의 목표는 깨어진 자아와 세상의 재연합과 재구축이다. 사랑에서 나온 지식이 추구하는 바는 창조세계의 착취와 조작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의 화해다.      


나는 그걸 동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릴 적 인형에게 이름을 붙이며 소꿉놀이를 하던, 길가다 빛이 붉고 곱게 변해진 단풍잎과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주워 책갈피로 사용하던 그때를 떠올려보자. 그 시기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귀했다. 그랬다. 모든 것이 귀한 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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