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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모 Nov 05. 2019

아이의 희망과 어른의 어리석음


움베르토 에코의 칼럼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원제: 언어로 세상을 여행하는 방법)을 읽으며 복정역 긴 터널을 나간다.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복정역은 북새통을 이뤄졌지만 손바닥만한 핸드폰만이 소리를 낸다. 사람들의 입술은 굳게 닫혔고 눈동자는 화면만 바라본다.      


“엄마 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주세요.” 


귀를 의심케 하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희망 한줄기를 붙잡듯 엄마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끝을 향해 내달리는 소설의 한 문장 같은 요청이다. 엄마는 아이의 요청에 피식 웃으며 외면한다. 또다시 아이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엄마를 바라본다. 아이의 끊임없는 외침에 엄마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이를 지나온 어른의 직무가 아닐까. 데카르트와 움베르토 에코는 어리석음을 인류 모두가 가장 공평하게 나눠 가진 인간의 천부적인 특성이라 주창하며 이 세상은 어리석음으로 반복되는 불만족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지만 온전히 불완전한 아이의 외침을 들을 때면 세상을 이끌어 가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희망을 향한 불완전한 외침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올라가는 에스켈레이터에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재잘거린다. 엄마는 그 아이의 외침을 듣고 이렇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노력하면 돼?” 아이의 외침은 더 이상 한 개인의 외침이 아니라 인류의 외침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이를 지나 어른이 된 이들의 몫이 아닐까. 비극과 희극의 차이는 희망의 위치이다. 희망이 생각으로만 맴돈다면 희망은 절망이 되어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러나 희망을 행동으로 살아낸다면 절망은 희망이 되어 주인공으로 새 삶으로 인도한다. 


아이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오직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물음은 아이의 몫이고, 고뇌는 어른의 몫이다. 복정역 에스켈레이터가 끝날 무렵, 민주노총에서 파견 나온 활동가가 노동법책자를 무료로 배포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내심 아이의 요청을 들은 엄마가 노동법에 관심을 갖기를 소망했다. 이 아이도 언젠간 대학생이 되어 알바를 하겠고 사회인이 되어 직장을 다닐 테니, 아이가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첫 발돋움을 노동법이 이뤄진 사회로 삼기를 바랐다. 


그러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활동가의 외침은 행인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고 아이의 엄마는 서둘러 지나쳤다. 지하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희망 한 줄기를 붙잡지 않고 걸음을 재촉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코웃음이 들려온다. ‘거봐. 모든 인간은 어리석어 희망이 있더라도 외면하지.’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이내 민주노총에서 배포하는 『2018 노동자권리 찾기 안내수첩』을 받아서 읽었다. ‘촛불로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직장의 민주주의와 노동자 권리 찾기는 요원하기만…’ 이 책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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