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아직 여름
아직 도달하지 못한 시절이 부르는 날이다.
바깥은 여름. 가을 땡볕에 잠시 나갔다.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가을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뱉는 숨마다 한숨 소리만 들렸다. 온종일 대지를 달군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막걸리 한 되를 받아다가 동네 어귀에 부었다. 대낮의 술이 어미아비도 못 알아본다더니, 태양도 취하게 만들 요량이었다. 혹시나 막걸리가 모자랄까 봐, 통째로 더 가져다 부었다. 먹다 남은 동태 전까지 곁들였다.
오랜만에 여름 씨와 얘기를 나눴다.
"올해 여름은 꼭 내 인생 같소." 내가 말했다.
한껏 취한 여름 씨가 낄낄대며 말했다.
"아 그게 내 탓이오?"
옷은 땀에 절어 있었다. 흙을 털고 집에 들어가려던 참, 그늘진 골목 끝에서 패랭이모자 쓴 건장한 사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의 관심은 나보다는 막걸리 냄새에 쏠려 있었다. 어느 틈엔가 할머니 한 분이 머릿고기 한 접시를 놓고 가셨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여보시오, 나는 어디로 가면 되오?"
패랭이모자 쓴 사내는 대답 대신 머릿고기와 막걸리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할머니에게 막걸리 한잔씩 따라드렸다. 할머니가 장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말했다.
"저짝 언덕 넘어오는디 맛있는 막걸리 냄시가 나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구먼, 쪼까 쉬다 가도 되제?"
할머니는 인절미 봉지를 풀며 웃었다. 우리는 셋이 둘러앉아 한참을 먹고 마셨다. 할머니는 먼저 일어나셨고, 사내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어째서인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내 또래쯤 되어 보였고 먼저 일어나면서 말했다.
"저어, 형씨. 나 먼저 갑니다. 마저 잡숫고 가시오."
한 열댓 걸음이나 걸었을까,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소리치는 걸 들었다.
"이놈아! 어찌 나를 못 알아보느냐!"
술기운이 단번에 가셨다. 돌아보니 그는 하늘색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는 나와 똑 닮아 있었다. 앞이 흐릿해졌다. 나는 황급히 큰절을 올렸다. 두 번 절을 하고 일어나니, 사내도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목화꽃 두 송이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