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과 책상, 그 사이의 이야기"
그는 오늘도 부엌에 섰다.
칼을 쥔 손은 여전히 익숙했다. 얇게 썰린 채소, 가지런히 놓인 고기, 타닥타닥 튀는 기름 소리까지, 이 모든 게 그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 익숙함 속에서 그는 불현듯 불편한 기운을 느꼈다. ‘이게 전부일까?’라는 질문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흔이 넘은 그의 마음속에선, 오래된 냄비처럼 자꾸 무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셰프로 살아왔다.
수많은 날들을 부엌에서 보내며, 불 앞에서 땀을 흘리고, 뭔가를 끓이고, 굽고, 삶아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맛있는 음식의 비밀을 찾아 헤매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마흔을 넘긴 지금, 그는 가끔 그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불과 기름 냄새, 가스레인지의 타는 소리, 그리고 그 속에서 부서지듯 돌아가는 자신.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그렇다고 요리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요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다만, 이제 그 열정이 조금은 다른 곳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책이었다.
인문사회과학, 철학, 소설, 에세이… 그의 부엌만큼이나 그의 책장도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주방의 열기 속에서 일하는 것보다, 책장을 넘기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는 늘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여겼다. 부엌이라는 작은 우주 속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듯, 그는 책 속에서 세상의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부엌에서의 삶과 책상 앞에서의 삶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주방에서 느끼던 열기와 손끝의 감각은 점점 글 속으로 스며들었고, 이제는 글 쓰는 순간이 오히려 그의 본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그의 글은 과연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을까? ‘내 글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까?’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도, 그의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국물 맛이 잘 안 나올 때처럼, 무엇이 부족한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그를 짓눌렀다. 그리고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 글들이 세상에서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글을 쓸 때마다, 그는 자신이 고작해야 흐릿한 잡음 같은 것을 내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그는 글을 사랑했다.
글을 쓰면서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그 글들이 세상에 닿을 수 있을지, 아니면 그저 자기만족에 그칠지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괴롭혔다. 글이 돈이 될까? 이 세상에 내놓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는 늘 고민했다. 불안한 마음은 마치 부엌의 가스불처럼 그의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주방과 책상 사이를 오가며,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마치 제대로 된 국물을 찾기 위해 끝없이 맛을 보는 것처럼, 그는 좋은 문장을 찾아 헤매었다. 그리고 그 좋은 문장 속에서 참다운 인생의 단서를 찾고 싶어 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지만, 그는 그 갈등이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 믿었다. 요리사와 철학자, 그 두 세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그는 그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다시 칼을 들었다.
불을 켰다. 주방의 열기는 그를 다시 감싸 안았고, 그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작은 진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글이든 음식이든, 그가 만드는 것은 결국 세상과의 소통이었다. 그리고 그 소통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갈망하고 있었다. 더 좋은 문장을, 더 깊은 맛을, 그리고 더 진솔한 인생을.
그리고 그는 알았다.
자신의 인생은 아직도 국물처럼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그가 만든 요리처럼, 그의 글도 언젠가 사람들의 입맛에 맞을 날이 올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천천히 익어가는 것이었다. 마치 제대로 된 육수가 끓어오르듯, 그는 그 시간을 기다리며 글을 쓰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