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공공연한 비밀-논고]

머리가 뒤늦게 따라온 글

by 랑시에르

보통 어떤 비밀을 말할 때에는 일반성을 띠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측정 불가능해 보이는 이 우주를 연구하는 '우주먼지'라는 과학자는 '과학적이다'의 반대말은 '반(anti) 과학'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비과학이라는 말이 가진 어감이나 뉘앙스가 부정적으로 사용된다고 해서, 비과학이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을 뿐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말 그대로 '비(非)-과학'인 셈이다.


만약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인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설명 가능했던 신화와 종교의 시대를 지나 과학만능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법 이전에 상식이 먼저인 것처럼, 우리에게는 과학 이전에 몸으로부터 오는 어떤 반응이 먼저였다. 그 느낌을 말과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여전히 비과학적이다. 느낌은 사실이지만 텍스트 안에서는 비과학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비과학은 '전설의 고향'처럼 구설을 통해 전해 내려왔다.


초기 프로이트는 너무나 과학적인 태도를 견지한 나머지, 사람에게 일정한 입력 값을 집어넣으면 동일한 결과를 얻어낼 것이라 고집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지금의 정신분석학을 만든 위대한 발견이 되었다. 우리는 무의식에 대해서는 비과학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한다. 다만 느낌으로, 대중적인 맥락(context) 안에서 그것을 공유할 뿐이다. 나는 이를 '느낌의 변증법'이라 부른다.


인류가 숫자 0을 발견했을 때 불교에서는 이를 '공(空)' 개념으로 정의했다. 숫자 0은 혼자 있을 때에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지만, 앞에 숫자가 붙으면 자릿수를 바꾸며 그 가치를 배가시킨다. 인간의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불교는 말하고 있다. 그러니 '비어 있음'이 아니라 '작용하고 있음'을 공이라 말하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바로 이러한 작용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분이 전체인 것처럼, 전체가 부분인 것처럼 말이다.


지식의 일반성을 뛰어넘을 때, 즉 그것이 보통의 것이나 일반적인 것이 아닐 때 사람들은 그노시스(Gnosis), 즉 영지주의라고 말한다. 보통의 앎이 아니라 특별한 깨달음을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예수를 영지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틀렸다고 본다. 예수의 비유들만 보아도 그는 일상 언어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언어에서 특별함을 끄집어낸다. 그게 더 그노시스적인 본질에 가깝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지적 수준에 따라 무언가를 판단할 때, 지적인 맥락 안에서만 판단하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사물 그 자체를 보지 못하는 것, 이것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줄곧 말해온 인식론의 뼈대이다. 인간은 '물자체'를 보지 못한다. 만약 이를 본다면 그는 열반에 든 자, 곧 깨달은 자일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사태 그 자체로 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일체개고'의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어떨까. 더 나아가 지금 내가 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내 인생은 왜 더 나아지지 않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그것이 언젠가 밝혀질 비밀이 아니라, 이미 모두가 몸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과학과 언어의 일반성 속에서 애써 외면해온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