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하는 감각과 은폐된 구조
비밀이 일반성을 띠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나, 그 일반성이야말로 주관이라는 미궁에 빠질 인류를 보호해 온 유일한 안전장치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과학이 ‘비(非)-과학’을 틀린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천문학자 ‘우주먼지’의 말은 정중한 배려일 뿐, 그것이 비과학의 영역에 실재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비과학은 설명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증명될 수 없기에 유예된 영역일 뿐이다. 우리는 이를 ‘신비’라 부르며 찬미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것은 증명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지적 태만일지 모른다.
우리는 과학 이전에 몸으로부터 오는 반응이 먼저였다고 말하며 ‘느낌’을 신뢰한다. 하지만 뇌과학의 관점에서 느낌은 사실(Fact)이 아니라 신경전달물질이 빚어낸 정교한 기만이다. 확증 편향이라는 거대한 필터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게 하며, 그것을 ‘우주의 공명’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로 포장하게 만든다. 내가 ‘느낌의 변증법’이라 부른 그 과정은, 사실 무의식이 만들어낸 자기 최면의 서사일 가능성이 크다. 느낌은 사실일지 모르나 그 사실은 오직 ‘나’라는 폐쇄된 계(System) 안에서만 유효한 고립된 진실이다.
숫자 0과 불교의 ‘공(空)’을 연결하여 작용주의를 말하는 것은 매혹적이다. 그러나 비어 있음이 배가의 작용을 한다는 논리는 위험한 칼날을 품고 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며 부분 안에 전체가 있다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현상의 책임을 개인의 내면으로 수렴시킨다. 내 인생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를 내면의 파동이나 ‘공’의 작용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개인이 발 딛고 선 땅의 기울기—즉, 가혹한 사회적 구조와 환경적 모순—를 은폐한다. 굶주리는 아이에게 ‘색즉시공’의 작용주의를 말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폭력이다.
칸트가 ‘물자체’를 말한 이유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독단적인 형이상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인간이 물자체를 볼 수 없다는 선언은 겸손이 아니라 인식론적 경계선이다. 만약 이를 몸의 느낌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칸트의 인식론을 빌려 칸트를 부정하는 형용모순에 빠진다.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강변하는 ‘그노시스’적 태도는 특별한 깨달음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를 사유화하려는 지적 오만일 수 있다.
일상 언어에서 특별함을 끄집어내는 것이 예수의 본질일지라도, 그 언어가 보편적 맥락(context)을 잃고 각자의 ‘느낌’으로 파편화될 때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법 이전에 상식이 있고 과학 이전에 느낌이 있다는 말은 위험하다. 상식과 느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비이성이 인류사를 어떻게 오염시켰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질문하고 싶다. 우리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믿어왔던 그것이, 실상은 내면으로 침잠하여 고통의 실질적인 원인인 구조적 불평등을 외면하려는 심리적 도피처는 아니었는가. 인생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의 영역으로 넘기는 순간, 우리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구체적인 힘을 상실하게 된다. ‘공공연한 비밀’은 어쩌면 비밀이 아니라, 우리가 직시해야 할 잔혹한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스스로 친 거대한 안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