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랑시에르 Oct 26. 2024

셰프는 하얀색 잘 어울려!

묻지 못한 안부마저 안녕하시길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단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가슴에서 울리던 진동이 온몸에 퍼져 무럭무럭 자랄 때에도, 처음의 빛을 끝까지 잃지 않고 함께 커갔다. 어머니의 일부에서 떨어져 나왔어도 그건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한결같이 어린 나를 따라다녔다. 때로는 한결같은 바람으로 머물며 나타났고, 봄햇살에도 처음 피운 꽃을 끝까지 지켜내듯 흐트러짐 없이 온몸에 닿았다. 억수처럼 비 내리는 날 밤, 핏기 사라지는 나를 안고 달음질하던 그녀의 젖가슴에 파묻혀 들었던 기억. 어쩌면 눈 감는 끝자락에 이르러도 처음 엄마로부터 받은 숨결로, 오롯이 처음의 뜻을 품고 시작됨의 맥을 끝까지 남길 것 같았다. 흐트러짐 없이 내 마지막 눌 자리 끝에 닿을 그것.




'불안'




나는 불안해서 슬펐다.
행복할 때면 더 불안했다. 언젠가 이 모든 걸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은 걱정을 데려와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고, 잠을 훔쳐갔다. 웃음도, 기쁨도, 일상의 모든 걸 도둑맞았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난 곳이 SNS였다. 거기엔 우울에 영혼이 갇힌 사람, 자기를 쉴 새 없이 설명하는 사람, 목석같던 감정에 싹이 난 사람, 세상을 뒤집어보는 사람, 모든 것을 재판하는 구름 위 사람들… 문장에 미친 여자와 문자에 중독된 남자,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거기엔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가 있었다. 독사에게 잡힌 땅꾼이며 한여름의 털장갑 장수, 한겨울의 수영복 장수도 있는 생태계였다. 남미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라 불리듯, SNS 속 사람들은 타자의 숨을 삼키고 눈을 약탈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군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약한 연대가 이뤄진 곳. 교수도, 작가도, 연예인도, 군인도, 정치인도, 직장인도, 엔지니어도, 예술인도 빠짐없이 기생하는 생활인들. 눈 뜨고 코베이는 곳, 장모님은 김서방을 찾았을지 묻고 싶은 대도시의 서울이었다.




진화는 evolution이지 혁명(revolution)이 아니었다. 적합성에 따라 적응하는 게 진화라면, 적응한 걸 뒤엎는 게 혁명일 테니까.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난 그곳에서 나는 페르소나를 줍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와 나를 대신할 형상을 만들고, 오랫동안 그 얼굴로 살았다. 그렇게 만든 가면이 사진첩에 차곡차곡 쌓였다. 변장에 능해졌고 감추는 건 미덕이 되었다. 그러다 커밍아웃이라도 하면 ‘cool하다’는 외래어로 치장해 주다가, 생얼에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민낯을 보고 싶지 않은 채 진화하고 있었다. 품었던 알(r)을 집어던진 이들이 패잔병처럼 아재가 되어 여시들에게 성농을 던지고, 구라파 명품으로 치장한 아짐이 되었다. 나라도 알을 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면을 쓰더라도 내 얼굴에 맞는 걸 쓰기로 했다. 불안이 훔쳐간 일상을 품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박혁거세는 양수를 터뜨리지 못해 양막 그대로 세상에 나와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장애를 가진 아이로 자라났고, 그 장애를 극복하고 박 씨의 시조가 되었다. 알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알을 깨고 나온 인물이라는 설정은 깨어남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렇게, 나도 엄마에게 하나의 사건이었다.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전설에도 굴하지 않고, 자랑스럽진 않지만 살아가고 있었다. 신앙심 깊은 엄마는 유아 세례 받은 내게 "예수 안 믿으면 내다 버린다"라고 말했다. 서른 넘어서야 엄마가 버리기 전 집을 나왔다. 그날 예수를 안 믿기로 했다.






서른셋, 예수도 서른셋에 죽었다.
광석이 형도 서른셋이 되자 떠났고, 서른넷이 되자 그의 노래를 더는 부르지 않았다. 나보다 어린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코도 베이고 김서방 찾지 못한 장모님을 만난 판국에 나를 내가 될 수 없게 하는 것들을 모두 밀어냈다. 그게 먼저 예수였다. 엄마를 시켜 협박하게 한 예수, 한때 그가 누군지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엉뚱하게도 그는 알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처녀에게서 나왔다고 했다. 신화를 거부하는 비신화의 인물. 구워삶기 좋게 각색되고 윤색되기 좋은 이름. 엄마를 뺏은 이름, 부부싸움의 원흉, 형을 잃게 한 예수... 그렇다면 예수는 뭘 잃고 있었을까? 자기 이름을 잃었을까? 그 많은 물음을 어쩌자고 다 놓고 갔는지 부럽기도 했다.


서른 셋을 넘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이를 두고 ‘예수 콤플렉스 증후군’이라 한다. 그도 알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알을 깨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여름 수박 맛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 쇠어가는 소리에도 콘크리트 무덤 같은 아파트 사이로 귀뚜라미 떼창은 울리고 있었다. 한지에 그 이름을 적었다. 한글 이름도 적고 영어 이름도 적고, 희랍어로도 적었다. 필요하면 히브리어도 그려 넣었다.


딸깍, 하고 라이터 불이 들어왔다.

“우리 이제 작별하는 거야. 그것도 영원히. 잘 가, 예수. 거기서 행복하게 살아. 다시 올 생각은 말고. 형이 갈 거니까.”





"ㅋㅋ 글이 참 재밌네요. 친구하고 싶어요."





 으레 신청을 받았다. 그게 마지막 글인지 몰랐다. 한 달 동안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갑자기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심한 구토와 땅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이었다.

"어... 나 가게 그냥 두고 나왔는데..."

찬바람을 껴안고 달려온 건 누나였다.

“너 간 수치가 너무 높아서 거기선 검사도 못 할 정도야. 그래서 한림대까지 온 거야.”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죽일 듯이 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야, 미친놈아. 너 죽을 뻔했다고!"

보통 간 수치는 45 이하를 정상이라 한다. 90 이상이면 관리를 해야 하고, 내 수치는 1764.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가게 가봐야 해요. 그냥 두고 나왔단 말이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릴 박차고 나가려던 내게 의사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기억하며 말했다. "지금 나가면 죽어요. 아직 살아 있는 건 젊어서 그런 겁니다."



없는 병실 만들어 나를 묶어두다시피 입원을 시킨 거였다. 하필 비싼 일인실 같은 이인실에 말이다. 한동안 고요와 적막 속에 살아야 했다. 하루 세끼 꼬박 나와 먹었지만 소화는 안 됐다. 그런데도 매번 똥은 나오고 싶어 했다. 죽는다는 의사 말이 무색하게 똥을 싸다가 죽을 것 같았다. 엄마는 그랬다. 기저귀 갈 때면 그렇게 웃어댔다고. 아직 일회용 기저귀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가제 기저귀였다. 그 똥 기저귀 얼마나 갈았던지 '아들 그만 좀 싸' 하는데 까르르하고 웃었단다. 그러니까 배변 활동에 아무런 이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해'맑게 '우'스며 '소'똥 했던 나였다. 그런데  똥 싸다가 죽을 뻔했다. 어떤 놈이 길레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봤다. 허옇게 생긴 것이 외계인이 싼 것은 아닌가 한참을 보고 있었다. 문득 병실에 혼자라는 사실에 섬뜩했다. 그동안 해맑게 우스며 소통했던 것을 벌 받기라도 하듯. 아니 똥 잘 누는 것도 죄인가요!




환하게 병실 불을 켜고 천장 형광등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광채를 내던 형광빛이 점점 섬뜩한 기분을 들게 했다. 아까 본 그거, 나를 죽게 만들던 그것처럼 변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푸른 섬광처럼 어둠 속을 번쩍하고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사라지는 섬광을 좇아가 보았다. 어둠은 그리 깊지 않았다. 섬광 빛이 흐려졌다. 거긴 섬광들의 무덤이었다. 그동안 내가 본 빛들이 거기에 빛을 잃은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내 고추 제일 맛있게 따 잡쉈다는 할머니도, 곱게 한복 차려입은 한복사 할아버지도, 내 생일에 물고기가 유난히 많이 잡혔다고 한껏 들떠, 누나 이름을 불렀을 아버지 기쁨도, 들끓는 나를 안고 밤새 달렸다는 젊은 엄마 눈물도, 거기에 있었다. 아름답게 솟은 무덤은 언젠가 신기해서 조물조물 만져본 엄마 젖가슴 같았다. 두근두근대는 그녀의 심장소리가 나는 곳. 내 심장 박동 소리와 닮아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었다.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았다. 힘을 줄수록 가위에 눌린 것처럼 거센 저항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환자분 팔 내리세요."


바깥 어둠에 섬광들이 창문에 박혀 있었다. 인기척은 온데간데없이 아직 팔을 뻗고 있었다. "환자분 이제 팔 내리세요." 책무를 다하고 있어 다정하면서도 피로한 목소리였다. 새벽 두 시 반이면 어김없이 단잠을 깨우는 것은 간호사였다. 아니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하루 세 번 체온과 채혈을 채취해 갔다. 문득 산나물이며 바닷가 미역, 전복 등이 이런 기분일까 생각했다. 만국 노동자의 착취를 멈춰라. 내 병세가 호전되기라도 하면 착취는 더 자주 내 몸에서 이루어졌다. 잠을 앗아가는 것도 모질라 체모나 피를 몇 번이고 뽑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팔을 내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혈압도 여러 번 쟀다. 퉁명스럽게 환자분 혈압이 낮아요. 괜찮아요, 똥은 잘 싸요, 밥은 다 드셔야 해요. 간호사 선생님의 정언명령이 떨어지면 내게서 모든 것을 훔쳐간 병원을 탈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나의 직업을 존중한 나머지 밤마다 문고리를 잡고 사투를 벌여야 했다. 허연 것은 허옇게, 지나치게 하얗게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분명, 이차돈처럼 순교할 거라 생각했다. 아직 순교할 수 없었다.



벌써 일요일은 세 번 토요일은 네 번째 다가왔다. 극락은 몰라도 지옥은 스무 밤만 자고 나면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섬광이 박힌 창문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펄펄 박혀있었다. 새 대통령을 뽑고 있었는지 연신 엄지 척을 해대거나 어설프게 팔을 흔들어대는 모습이 테레비에 흘러나왔다. 파랑과 빨강의 대결이었다. 마을 잔치도 아닌데 병실마다 술렁였다. 온통 빨강 파랑 얘기였다. 이 세계의 색은 그 둘만 있는 것처럼. 메트릭스 알약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랬다. 분명 그랬다. 그 알약 얘기였으니까. 자기는 약도 빨간 약만 바른다고 아우성쳤다. 가오 있는 어투였다. Red Pill 먹고 자유와 현실의 고통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또 Blue Pill을 오랫동안 먹어왔으니 안락함과 무지 속에 살아가겠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술도 블루만 먹는다고 했다. 퍼런 거. 그거. 양주 냄새는 말투였다. 나는 둘 다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왜 선택해야 하나요. 전 약 잘 먹어요. 둘 다 줘봐요. 어떻게 되는지 볼게요. 어서요. 전 똥이 하얗다니까요!




병원 밖은 온통 눈이었다. 얼마나 밟아댔는지, 그새 눈은 길바닥 흙먼지에 흠뻑 취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바깥 구경은 이십사일 만이었다. 그토록 공기가 낯설게 느껴지리라 생각도 못했다. 매캐하게 파고드는 냉기가 나의 여린 폐를 금세 타락시키는 것 같았다. 현실, 이 낱말이 주는 묘미를 느꼈다. 그제야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 포즈를 취해보았다. 그루밍 한번 하지 못한 얼굴, 추레함이 무엇인지 온몸 유희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오래가지 못했지만. 내 등짝에 살얼음이 된 누나의 손바닥이 날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자유-'라는 외침에 앤드 듀프레인에서, 순식간에 멜깁슨의 'freedom'의 프레임 전환이었다. 4 채널의 드드득하고 거칠게 돌려야 했던 금성 테레비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등짝을 맞는 순간 '브레이브하트'가 된 거였다. 훈련소에서 주던 모포색 브레이브맨 빤스와 같은 그 '브레이브' 하트였다. 나의 용기도 여기까지.


"미친 새꺄, 너 찬바람 쐬면 죽어."


이미 여러 번 허연 것 때문에 그리고 누나의 살얼음 손바닥에 죽었으리라.


가족들이 없는 밤이면 그녀는 조용히 찾아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안아주었다. 차마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겼다는 성토는 하지 못한 채. 애써 진지한 연인의 눈빛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또 물었다. 아쉬워서 묻지 못한 안부마저 안녕하냐며 물었다. 젊은 연인의 팔을 가볍게 물었다. 남의 살 오랜만에 맛보고 싶었다. 하얀 피를 너무 흘려서 순교한 것은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으니까. 누군가의 살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 온기 들어찬 뽀얀 사랑방 같았다. 아주 작고 여린 피난처. 어쩌면 기댈 수 있을 거란 욕심으로 말이다. 기숙사 늦겠어 어서 들어가. 나는 이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니까. 속으로 말했다. 솁,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까 진짜 아저씨 같아. 자기 연인이 아저씨여서 운 것인지, 아저씨가 되어서 운 것인지 묻고 싶지 않았다. 흑흑거렸으니까. 세상 모든 눈을 녹이고도 남을 뜨거운 성탄 전야도 보내지 못했다. 제야의 종소리 듣겠다고 만났다가 상여 소리 들을 뻔했다. 삐걱거리긴 해도 그해는 잘도 넘어 다음 해를 힘껏 밀어 올렸다. 그렇게 우리가 처음 만난 겨울이 왔다. 내 정신도, 몸도 그때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전 05화 심야버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