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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시에르 Oct 19. 2024

심야버스

마지막 종착역은 해운대입니다

여름밤이었다.

광안대교가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들 왔는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밤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夏至)가 지나서인지 낮은 길었고, 바다는 그 긴 낮의 피로를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듯했다. 파도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말소리를 철썩, 말소리를 삼켜버렸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유람선이 통통거리며 대교 밑을 지나갔다. 그 모습은 몇 년 전, 내가 잊고 있던 해운대 밤바다를 툭 꺼내놓는 것 같았다.


"솁, 우리 해운대 가지 않을래요?"

스물한 살의 은하는 해운대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고 했다. 밤바다를 보는 것이 인생의 소원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서른두 살의 나는 그때 가장 큰 걱정이 ‘부모님 허락’ 같은 사소한 것이었다. 은하는 늘 계획을 세우고 나를 설득하는 쪽이었고, 나는 언제나 안 될 이유를 찾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나도 함께 밤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녀의 첫 밤바다에 내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었다. 책임감과 욕심 사이에서 갈등할 필요도 없었다. 사랑은 그런 순간에 국경도, 시간도 뛰어넘는 법이니까.


동서울 터미널에서 출발한 심야버스는 새벽 3시 반 즈음 해운대 앞에 멈췄다. 파도는 어둠을 씹듯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은하는 내가 예상했던 감탄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둠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두 팔을 가볍게 벌리며 눈을 감고는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도 모르게 그녀의 동작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솁, 그럼 가실까요?"

익살스럽게 손을 내밀더니, 이내 내 손을 잡아끌고는 바다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은하의 손은 언제나처럼 시원하고 깨끗했다. 마치 바닷바람도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불어왔다.


"솁, 우리 맥주랑 안주 몇 개 사서 여기 앉아 마셔요."

은하는 흥분을 감출 수 없다는 듯이 외쳤다.

"밤바다 보면서 맥주 마시는 게 내 소원이었거든요."

기말고사가 막 끝난 뒤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은하는 전형적인 이과생이었다. 머릿속은 암기할 것과 시험 준비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그날의 해방감은 시원한 캔맥주와 게맛살, 막대 모양 소시지로 충분했다. 낭만이라는 건 자본 따위와는 상관없었다. 나는 돈이 많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충분히 완벽했다. 우리는 바다를 마주 보고 앉았다. 벅찬 기분이 가라앉을 때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뭐가요?"
"해운대 밤바다 말이야."
"그냥 좋아요."

나를 가볍게 훔치듯이 말했다. 우리는 아직 서툰 연인이었다. 성년의 날, 장미 백 송이와 함께 고백을 했던 그날 이후 우리는 조금씩 연인이 되었다. 나는 항상 선을 그어두는 사람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연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의무보다 함께하는 순간이 더 중요했다. 인터넷에서 본 '연인끼리 하면 좋을 것 같은 리스트'가 떠올랐다.


"은하야, 우리 서로에게 편지 써주면 어때?"
"지금요? 여기서요?"
"응, 바다에 던질 유리병에 담아보려고."
"그거 너무 낭만적인데요!"

나는 편지에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네가 웃는 날들이 많기를 바란다. 내가 아닌 누군가와.’라고 적었다. 그럴 일은, 글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유리병에 담아 바다 멀리 던졌다.

"솁, 뭐라고 썼어요?"
"비밀이야. 너는?"
"음... 나도 솁이랑 같은 말 썼어요."
"... 응?"



그때 찬우가 다가와 외쳤다.

"형, 이제 공연 시작해요!"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부산에서 맞이하는 마흔네 번째 버스킹이었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제자들도 꽤 모였다. 고등학생인 현지도 그중 하나였다. 현지는 영상 통화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아이였다.


"현지, 우리 자주 보는데도 여전하네."
"네, 그런데 볼 때마다 신기해요. 이런 아저씨가 우리 선생님 남친이라니."
"풉, 미안해. 내가 너무 아저씨라서."
"그런 게 아니라요. 어른들이 사랑하는 게 너무 신기해서요."
"뭐가 그렇게 신기한데? 아저씨가 사랑하면 안 되는 거야?"
"두 분 만나면 뭐해요? 선생님이랑 무슨 얘기해요? 그냥, 손만 잡고 가만히 있어요?"


현지는 다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것처럼 보였다. 몇 년 후, 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다. 손잡고 껴안고 뽀뽀만 한 건 아닐 테지. 현지 닮은 아이도 생겼다고 하니까.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관객들 사이에서 울려 퍼졌다. 청아하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밤을 밀어내고 파도를 가르고 있었다. 그녀가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사이렌 같았다. 모든 슬픔과 외로움을 떨쳐내는 목소리. 그게 그녀가 노래하는 이유였다. 한 시간 넘게 아무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몇 번의 앵콜이 끝나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를 마주했다.

"오빠!"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움에 와락 안겼다.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압도하던 그녀도, 무대에서 내려오면 언제나 사랑스러운 한 여자가 되었다. 나는 꽃을 내밀며 말했다.

"정말 멋졌어. 네 목소리가 이 밤을 다 채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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