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 아버지 되는 사람이오
지난밤 아버지가 꿈에 나오셨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부지 어쩐 일이요? 꿈에 다 나오시고." 낡은 양복바지 일복 삼아 입고서는 무릎까지 접어 올린 모습이었다. 반질반질하게 손에 익은 날이 선 낫도 들고 계셨다. 나도 잡아본 기억이 있었는데 군살배인 손바닥에 알맞게 패어있었다. 낫은 기억 속 할머니의 굽은 등과 닮아 있었다. 낡고 오래된 것. 매끈하게 반질반질하게 닳았지만, 그곳엔 묵직한 세월이 고여 있었다. 그 꼬부랑 할머니 표본은 영진이네 할머님이었다. 중학 일 년 서울, 학폭에 시달릴 때 어머니는 영진네 할머니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하셨다. 내 코가 석자인지라 굽은 등만 보면 언제나 영진네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논에 가시는 모양이었다.
남색 양복바지엔 이미 뻘이 튀어 있었다. 흙먼지가 덮인 줄무늬 와이샤스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게를 단단히 메고, 정력 넘치는 걸음으로 냇가 쪽으로 향하셨다. 그물치고 남의 집 일 도와 산 땅이었다. 또랑에서 붕어 잡겠다고 빠져 있었으니 아버지가 지나는 것도 몰랐다. 그러다 영진이가 말했다.
"야, 느그 아부지 아니냐잉? 어디를 저리 가신대? 너 여깃는 거 모르는 것 같은디"
아버지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다.
지게와 작대기를 들고 가는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씩씩해 보였다. 내가 본 적 없어 모르는 서른 갓 넘은 아버지였다. 지푸라기와 진흙이 섞인 고무신 자국이 먼발치로 마른땅에 족족하니 흔적을 남겼다. 냇가로 뻗은 비포장 길 아버지의 족족을 따라 달렸다. 어찌나 힘 있게 걷던지 일곱 살짜리가 좇기에는 숨이 찼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흙바닥에 손바닥이 까졌으니 참다가 말아버린 울음 섞인 신음을 내버렸다. 아버지가 잘 들었으면 하는 목소리로.
눈에 눈물이 나기라도 하면 엄마라고 부를 때에 말은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이름을 지녔는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지, 속은 괜찮은지 변소는 빠지지 않고 다니는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부르지 않으면 호랭이 물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불러야 하는 무엇이었다. 어쩌면 아득한 시간 속 드러내는 내 살 맛 같은, 맨들하고 슴슴하여 말캉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 불러야 할지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저 누나가 그 이름을 부르고 달려가 안기는 모습만이 선명했다.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그러니까 내가 기억이 생기고 아직 숫자를 열까지 겨우 셀 때에 불러 본 무엇이었다. 그것도 마음으로 엄마를 부르고 입으로 애타게 찾는 이름이었다.
"아빠..."
낯설었다. 어쩌면 너무 오랫동안 부르지 않은 존재였다. 나는 흙먼지 속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한참 동안 지켜봤다. 눈앞의 풍경이 흔들리는 것처럼, 내 마음도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머릿 숱이 많고 까맣게 그을린 사내의 얼굴. 사내는 나를 몰라보았다. 육 척 조금 안 되는 그 사내가 얼마나 커 보이던지. 구슬프게 불러보았지만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대게 시골은 애라고 봐주는 일이 없었다. 말 귀를 알아먹기 시작하면 일을 시켰다. 이제 막 오줌 가리기 시작한 다섯 살짜리에게 막걸리 심부름을 당연히 시키는 곳이었다. 내가 일곱 살 되던 날 입회식, 그러니까 경운기 시동을 걸기 위한 막대기 모양 쇠붙이를 들 수 있는 나이가 됐다는 의미였다. 한 짝만 남은 만(卍) 자 모양의 막대기를 엔진 고리에 걸고서는 왼손으로 밸브 민 상태에서 오른 팔로는 원을 그리는 것이었다. 제 나이보다 많게 돌려야 했다. 생일이 지나 제법 장독대에서 뛰어내리고 감나무에 매달릴 만 힘이 생긴 참이었다. 오래된 미래를 보는 것처럼 가녀린 팔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버지의 팔뚝을 물려 받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래서였는지 그 일곱 살은 해내고 만다. 검은 기름으로 범벅된 경운기 엔진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앞대가리를 연신 주억거렸다.
그러니 어떤 아이가 자빠져도 지나치는 일은 자연스러운 시골 풍경이었다. 막내라고 예외 없었다. 하필 물려받을 재산 없던 아버지도 막내였다. 아니지, 전쟁통에 내다 버린 막둥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귀머거리가 된 아이였다. 알아듣지 못하니 형들과 누나들이 데려다 부릴 때로 부려 먹었다. 국졸이라도 시켜준 것도 꼬래 아들이라고 해준 거였다. 어쩌면 프롤레타리아를 부려 먹기 위해, 아니 인류가 문자를 개발하고 발전시킨 것은 적어도 착취를 위하거나 통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해남, 그러니까 땅끝에서도 있었다. 그것도 피붙이라고 우려 잡수던 가족 울타리에서. 그러니 카프카의 그레고리 잠자는 해남에도, 소련에도, 쿠바에도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카프카 살던 유럽 동네와는 다르게 우리 시골은 협동이라는 이름으로 조합까지 있었으니 벌레로 변할 일이 없었다. 닭도 오지게 많았으니까.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어 마침내 따라잡았다.
"아빠." 하고 부르자.
대뜸 여기서 뭐 하고 서 있냐고 그러더니 내 이름이 든 봉긋한 주머니 같은 아니, 팥주머니를 입으로 뜯고 계셨다. 거기에는 진녹색으로 된 부적이 끈으로 묶여 있었다. 거칠 게 뜯고서는 내게는 한 적 없는 채근을 하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는데 국화빵이든 붕어빵이든 팔아서 묵어야 할 거 아니냐, 이 주머니가 뭐라고 이거 가지고 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냐, 막둥아 얼른해야, 아 언능아!"
몇 주 전 아버지는 내가 먹물이 되지 않아서 매우 아쉬워하셨다.
"니가 머리가 좋아서 우리 문중에서 키워줄라고 했제"
많아야 오십 가구가 있는 와룡리였다. 있을 문중이라고는 큰집을 중심으로 한 오촌아제들, 그리고 만수리나 오산리에나 가야 사돈의 팔촌이 계셨다. 키워봐야 목포로 진출해 광주 일고 가는 일이었다. 셋째 큰 아버지가 해남 팔학군 엘리트 코스를 밟아 빛고을 광주에서 나랏밥을 드셨으니까. 우리 고향 문중은 빛고을로 흘러드는 일이 등용문 같거였는지 모르겠다. 물론 셋째 큰아버지는 전두환이 개이새끼라며 외쳤던 패기 넘치는 경찰서장이었다. 훗날 파출소장으로 은퇴하셨어도 나랏밥은 꼬박꼬박 드신 셈이다. 내게 책이라는 교양을 아낌없이 보내주셨으니 나름 문중에서 키워준 것도 맞았다. 빛고을 광주 큰아버지 닮은 놈이, 귀머거리 아버지 아들로 태어났으니 고모들이 날 하늘로 띄운 일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도 막걸리 심부름이며 모내기 못줄 잡는 일로 부려 먹었으니 그 또한 문중 차원에서 유학 준비 한 거나 다름없었다.
젖 비린내가 할머니 방에서 신선하게 나리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 밭에 다녀 올 게요. 인사하던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아야, 애기 여기에 두면 어뜩허냐, 사람들이 올 텐데 언능 데려가라잉." 시집살이 한번 하지 않으셨다는 할머니였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사람들이 모인다니요? 애를 깔아뭉갤지도 모른다니요." 할머니는 엄마를 채근하셨다. "아야, 사람들 몰려온 깨 언능 애기 딴 데로 옮겨야!" 그것은 내가 아직 기억이 생기지 않아 기억의 기억으로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와 나에 대한 기억이었다. 내가 태어난 그 해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얼마 전에 아내와 살고 있는 곳에 오셨다. 거실과 주방을 둘러보시던 할머니가 낮잠 중에 오셨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를 시절이었으니 안방에서 나와 가만히 불렀다.
"할머니..."
하얀 저고리에 뒷짐을 지시고는, 어떻게 사는지 보러 오셨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온화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오후 두 시가 넘어가고 있으니 고요했다. 할머니도 나도 고요하게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젖 비린 내와 기저귀 냄새가 섞인 풍경이었다. 아직 쪼글 해 오줌만 싸는 고추와 흘러내릴 듯 앙증맞은 살주머니에 담긴 불알을 누구보다 잘 관찰한 분이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분, 그러니까 내 속사정까지 다 관찰하여 보신 분이었다.
"오냐오냐, 내 새끼."
그 말이 꿈속에서 스르르 퍼졌다. 꿈이지만 그 온기가 내 몸을 감싸는 듯했다. 잠에서 깼을 때, 그 온기가 아직도 방 안을 떠다니고 있었다. 거실에 나가 보니 오후 세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출근길 아내가 청소했는지 거실이나 주방이 깨끗했었다. 열린 창문으로 가을바람이 시원하게 거실을 지나 베란다로 달려 나갔다. 나는 할머니께 큰절 세 번을 올렸다. 그리고 서울에 계신 아버지께 한번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