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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시에르 Oct 18. 2024

기쁜 우리 젊은날

사랑해서 불안하나요? 불안해서 사랑하나요?


"솁, 스케이트 타러 가지 않을래요?"



2월 말,

나는 드디어 퇴사라는 단어와 친구가 되었다. 은하도 3월 개강과 함께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당시 라멘 가게의 분위기는 꽤 근사했다. 같은 처지의 젊은 알바생들이 모여, 마치 우리끼리 모르는 비밀클럽이라도 만든 듯한 기분이랄까? 불안한 내일을 눈앞에 두고도 우린 유쾌하게 그 불안을 맥주잔에 담아 건배하곤 했다. 명절이 끝나면 당일치기로 여행도 떠나고, "누가 제일 먼저 때려치울까" 내기라도 하듯이 일도 열심히 했다. 나, 켄타, 은하, 지희, 코우키, 미사토. 팀워크는 마치 비법 소스처럼 찰떡궁합이었다. 그 중심에 나, '점장님'이 있었는데, 내가 그만둔다고 하니 은하 또한 못내 아쉬워했다.


우리는 한 번도 마음을 확인한 적이 없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알아서 '이 정도면 알겠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썸'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그런 이름은 없다. 은하는 나를 나이 든 아저씨, 편안한 아저씨, 든든한 어른으로 봤다. 그게 딱 좋았다. 나 역시 은하가 저녁에 출근할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살짝 들뜬 기분이 들곤 했다.


가게는 대학가 근처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고, 그중에는 유명한 퀸카, 승진이도 있었다. 승진이는 한눈에 봐도 예뻤고, 가끔 내게 "점장님 같은 남자랑 사랑하고 싶다"며 장난 섞인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넘어갔지만, 때때로 그 메시지가 머릿속에 오래 남기도 했다.


"점장님은 어른이잖아요. 어른이랑 사랑하면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헛웃음을 지었다.

"어른이랑 사랑하면 불안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 올 때마다 점장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시잖아요. 그 모습이 매력적이에요."

그 순간, 가까이서 본 승진의 얼굴은 한층 더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저 웃었다.

"난 승진이 나이가 부럽다. 그리고 너는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야."

승진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도 점장님 같은 아저씨랑 사랑하고 싶어요. 안정감 있잖아요." '안정감.' 그 말이 참 묘하게 느껴졌다. 은하도 나에게서 그 안정감을 느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안정감이 우리 관계의 끝을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불안해야만 사랑이 더 빛난다고 믿었으니까.


 3월 1일, 잠실에서 만나기로 한 날.

나는 스케이트를 한 번도 타본 적 없다고 말하자 은하가 "그래서 더 재밌는 거잖아요!"라고 웃으며 뛰어나왔다. 그날 우리는 비싼 초밥을 먹고, 얼음 위를 헤매며 손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웃었다. 빙판 위의 남녀는 불안정해야만 서로를 더욱 믿게 되는 법. 손을 잡고 깔깔거리며 웃을 때, 우리는 어쩌면 그 순간만은 빙판 위가 아닌, 둘만의 세상 위에 있는 듯했다.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자 은하는 갑자기 "큰일 났다"며 당황했다. 기숙사에 있는 모습을 찍어 엄마에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급하게 택시를 잡았고, 한숨을 쉬던 은하는 어느새 내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그녀의 여린 솜털, 빨간 틴트, 느슨하게 풀린 머리칼이 다정하게 내 옆에 머물렀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저 작은 존재가 불안과 안정 사이에서 어디로 기울지 모르는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가 기숙사에 도착하자, 은하는 "잠시만 기다려요"라며 뛰어 들어갔다. 나는 편의점에서 캔커피와 밀크티를 샀다. 십 분도 안 되어 은하가 다시 나왔다. 그녀의 웃음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어머니께 사진 보내 드렸어? 괜찮아?"

"네, 지희랑 놀았다고 둘러댔어요."

"아, 다행이다."


그 순간, 은하의 웃음은 나를 조금 더 가볍게 만들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면서 남의 집 딸을 데리고 노는 아저씨의 죄책감이 종종 나를 괴롭혔지만, 어쩌면 그게 은하를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은하의 마음을 알기 전까지는. 막차 시간이 다 되어가자, 은하는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솁, 오늘 우리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알고 보니, 은하는 기숙사에서 외박을 허락받아 엄마에게는 집에 간다고 둘러댔던 것이다. 아마도 이 이벤트를 준비하며 하루 종일 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일 테지. 내 성격상, 미리 말했다면 절대 안 된다고 했을 거니까.


"저 기숙사에서 옷만 갈아입고 나올게요. 기다려요."


그날, 더 이상 막차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룸메이트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 안 들어가니까 연락하지 마."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내일의 불안도, 어머니의 걱정도, 은하의 염려도 없는 완벽한 밤이었다. 은하가 가방을 메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솁,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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